“이제 말복만 남았네, 어서 추운 겨울이 오면 좋겠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 식당을 들어서며 하는 말이다. 여름, 겨울 일 년에 두 번씩 만나는 모임인지라 나는 그들이 작년 겨울에 했던 말을 뚜렷이 기억한다. “너무 추워,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몇 달간 살다 오면 좋겠어.” 내 기억이 맞는다면 친구들은 언제나 날씨와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고 과감히 생업을 미루고 좋아하는 날씨를 찾아 떠날 용기까지는 없을 테지만 말이다.
더운 날씨. 나는 어지간해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으려 한다.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고,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만약 여름에는 에어컨만, 겨울에는 히터만 찾는다면 우리 인간은 계절의 흐름을 무감각하게 느낄 공산이 크다. 혹자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으며 오히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간이 환경을 지배하고 있다며 웃을지도 모른다.
과연 인간이 환경을 지배할 수 있을까? 과거보다 비교 불가의 발전 속도에 사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 삶이 마무리되기 전, 불로장생의 비밀을 과학이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이 편하고 유한(有限)이 무한(無限)의 개념으로 돌아서는 순간에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한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소중함의 가치는 떨어지고 행복의 질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같은 무게이지만, 보석이 돌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 희소성 때문이다. 만약 길가에 부딪히는 돌들이 모두 보석이라면, 어쩌면 우린 진짜 돌을 귀한 보석(寶石)이라 부를지 모른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여름휴가가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간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충전의 시간을 선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중, 300일이 휴가라는 가정과 우리가 가지는 1주일이라는 실제 휴가의 질적 가치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지천으로 깔린 휴가라는 시간, 그리고 1년을 기다린, 네잎 클로버 같은 짧은 휴가, 과연 당신은 어디에서 질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지 묻고 싶다.
많다는 것과 행복의 정의를 동일 선상에 두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만약 그렇다면 많이 가진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결핍된 부분, 즉 돈이 부족하다는 상황에서부터 찾으려 하기 때문일 수 있다.
옆집 동네 세탁소 주인장은 언제나 웃는다. 무에 그리 좋은 일이 많은지 궁금해 물어본 적이 있다. 대형 세탁소의 등장으로 매출이 줄어드는 환경, 그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생활에도 한 달에 한 번 아껴둔 용돈으로 집 근처 양로원을 방문한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아이스크림, 겨울에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호빵을 사서 말이다. 10만 원 남짓 되는 돈이지만 그가 느끼는 행복감은 그 이상의 더 가치 있다며 벌써 2년째 ‘양로원의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自處)한다. 이제는 어르신들 손자 손녀 이름까지 기억하기도 하고, 유독 단팥빵을 좋아하는 한 할아버지에게 빵을 건네는 순간, 그는 엔도르핀이 샘솟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인다. “우리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이렇게 하면 좋았을 것을, 아이스크림도 단팥빵도 정말 좋아하셨는데”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는 목소리, 내 마음에는 눈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의 뒤늦은 후회, 삶의 유한함을 그 시절은 몰랐으리라.
행복에 대하여 글을 쓰고 강의하는 사람으로 행복하기 위한 사자성어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말을 하고 싶다. “오늘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라”라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말과 ‘알아야 한다’ 이다. 즉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했던 그 표면적으로 의미가 아니라 세상 여러 풍파를 겪으며 배운 말이다. 행복해지려면 시점을 바로 오늘, 지금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환경, 가진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느끼고 만족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무한이 아니라 유한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도,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 안분지족,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은 정말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오늘은 당신의 남은 날 중에 제일 젊은 날이다. 불평보다는 오늘을 즐겨보자.
더운 날씨. 나는 어지간해서는 에어컨을 틀지 않으려 한다. 여름은 여름다워야 하고,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만약 여름에는 에어컨만, 겨울에는 히터만 찾는다면 우리 인간은 계절의 흐름을 무감각하게 느낄 공산이 크다. 혹자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물으며 오히려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간이 환경을 지배하고 있다며 웃을지도 모른다.
과연 인간이 환경을 지배할 수 있을까? 과거보다 비교 불가의 발전 속도에 사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 삶이 마무리되기 전, 불로장생의 비밀을 과학이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이 편하고 유한(有限)이 무한(無限)의 개념으로 돌아서는 순간에 우리는 과연 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유한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소중함의 가치는 떨어지고 행복의 질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같은 무게이지만, 보석이 돌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그 희소성 때문이다. 만약 길가에 부딪히는 돌들이 모두 보석이라면, 어쩌면 우린 진짜 돌을 귀한 보석(寶石)이라 부를지 모른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여름휴가가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간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충전의 시간을 선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년 중, 300일이 휴가라는 가정과 우리가 가지는 1주일이라는 실제 휴가의 질적 가치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지천으로 깔린 휴가라는 시간, 그리고 1년을 기다린, 네잎 클로버 같은 짧은 휴가, 과연 당신은 어디에서 질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지 묻고 싶다.
많다는 것과 행복의 정의를 동일 선상에 두고 해석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만약 그렇다면 많이 가진 사람은 행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결핍된 부분, 즉 돈이 부족하다는 상황에서부터 찾으려 하기 때문일 수 있다.
옆집 동네 세탁소 주인장은 언제나 웃는다. 무에 그리 좋은 일이 많은지 궁금해 물어본 적이 있다. 대형 세탁소의 등장으로 매출이 줄어드는 환경, 그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생활에도 한 달에 한 번 아껴둔 용돈으로 집 근처 양로원을 방문한다고 한다. 여름에는 시원한 아이스크림, 겨울에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호빵을 사서 말이다. 10만 원 남짓 되는 돈이지만 그가 느끼는 행복감은 그 이상의 더 가치 있다며 벌써 2년째 ‘양로원의 키다리 아저씨’를 자처(自處)한다. 이제는 어르신들 손자 손녀 이름까지 기억하기도 하고, 유독 단팥빵을 좋아하는 한 할아버지에게 빵을 건네는 순간, 그는 엔도르핀이 샘솟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인다. “우리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이렇게 하면 좋았을 것을, 아이스크림도 단팥빵도 정말 좋아하셨는데”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는 목소리, 내 마음에는 눈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의 뒤늦은 후회, 삶의 유한함을 그 시절은 몰랐으리라.
행복에 대하여 글을 쓰고 강의하는 사람으로 행복하기 위한 사자성어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말을 하고 싶다. “오늘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라”라는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이라는 말과 ‘알아야 한다’ 이다. 즉 깨우쳐야 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했던 그 표면적으로 의미가 아니라 세상 여러 풍파를 겪으며 배운 말이다. 행복해지려면 시점을 바로 오늘, 지금으로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환경, 가진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불행한 이유는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을 느끼고 만족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무한이 아니라 유한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도, 그 어떤 것도 완전히 소유할 수 없다. 안분지족,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마음은 정말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오늘은 당신의 남은 날 중에 제일 젊은 날이다. 불평보다는 오늘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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