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대단한 친구들이군요. 아이들은 지금 잘 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어른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할 때입니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파리 올림픽 기사 댓글 중).
2024년 제33회 파리 올림픽을 빛낸 태극전사들의 선전이 감동스럽다. 한국 선수들이 ‘총 칼 활’ 종목에서 유독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총 칼 활’에 강한 민족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총 칼 활’로 조상들은 나라를 지켰고, 후손들은 나라를 빛냈다.
올림픽의 좌우명이 되고 있는 ‘승리보다 참가에 더 의의가 있다’는 말은 1908년 제4회 런던 올림픽 당시,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이 대회 연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개인 간의 경쟁을 넘어, 국가 간의 경쟁이 된 지는 오래다. 승리를 향한 선수들의 분전엔 개인과 가족, 국가의 명예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드러난 경기 결과 이면엔 저마다 풍성한 스토리가 매달려 있다. 기록은 역사가 되고 뒷이야기는 전설로 남는다. 그러기에 승자도 패자도 눈물을 쏟는다. 간절함과 애석함이 교차되는 곳이 바로 올림픽 경기장이다.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군 전 병력이 필요했지만, 로마는 단 한 명의 에티오피아 하사관에 의해 점령당했다.”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에서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전 세계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마라톤에서 흑인이 우승한 전례가 없어 흑인은 장거리에 약하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를 뒤집었고, 당초 출전하기로 된 선수가 무릎을 다쳐 못나오게 되자 대체 출전한 무명 선수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기 때문이다. 특히 주최국 이탈리아 언론은 경악했다. 1935년 독립 왕정국가이던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점령했던 제국주의 흑역사의 전과가 있었기에 마치 에티오피아가 그 복수를 자국 수도 로마에서 벌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도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으로 말이다.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의 친위대로 근무하던 아베베는 6·25 전쟁 중 에티오피아 칵뉴부대의 하사관으로 참전한 이력도 있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가장 먼저 나온 금메달의 주인공은 한국의 여고생 사격선수 여갑순이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의 금메달 주인공도 대한민국이었다.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의 영웅’으로 등극하며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 이날 새벽 뜬눈으로 마라톤 경기 중계 장면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몬주익 경기장을 향한 내리막 구간에서 일본 선수를 추월하며 독주하던 황 선수의 당당한 모습에 열광했다. 아침 출근길 뿐 아니라 온종일 마라톤 우승의 감격으로 보냈다. 당시 대선을 몇 달 앞두고 정치권에선 여야의 첨예한 선거전과 정쟁이 이어졌으나, “국민들이 이렇게 기뻐하는데 오늘 만큼은 정쟁을 자제하자”며 여야가 휴전했다. 그때는 정치도 낭만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프랑스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리러 갑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여자 유도 허미미 선수가 던졌던 출사표다. 개인전 은메달과 혼성 단체전 동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올랐으니 이 말은 현실이 됐다. 국경을 넘나든 어려움 속에서도 첫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여자 유도의 간판’으로 우뚝 선 허미미 선수의 인생사가 주목받고 있다. 허 선수는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 지사의 후손(5대손)이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출신인 허석 지사는 일제강점기인 1918년 8월경 군위군 의흥면으로 통하는 마을 근처 도로 곁에 세워진 비석에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붙였다가 옥고를 치렀고 1920년 출옥 후 3일 만에 순국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허미미 선수는 유도 선수였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해, 일본 전국중학교유도대회 여자 52㎏급 우승, 일본 카뎃유도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승승장구했다. 허 선수의 인생행로를 바꾼 것은 할머니의 유언이었다. 2021년 작고한 허 선수의 조모는 손녀에게 “한국 국가대표로 선수 생활을 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허미미 선수는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바로 한국행을 택했다.
태극마크를 단 팀코리아 젊은 선수들의 투혼이 이국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가슴졸이며 우리 선수들의 선전과 승리를 기원하는 순간 만큼은 모든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다. 국민에게 일체감과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것에 스포츠만 한 것이 없나 보다.
2024년 제33회 파리 올림픽을 빛낸 태극전사들의 선전이 감동스럽다. 한국 선수들이 ‘총 칼 활’ 종목에서 유독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총 칼 활’에 강한 민족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총 칼 활’로 조상들은 나라를 지켰고, 후손들은 나라를 빛냈다.
올림픽의 좌우명이 되고 있는 ‘승리보다 참가에 더 의의가 있다’는 말은 1908년 제4회 런던 올림픽 당시, 근대 올림픽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이 대회 연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하지만 올림픽이 개인 간의 경쟁을 넘어, 국가 간의 경쟁이 된 지는 오래다. 승리를 향한 선수들의 분전엔 개인과 가족, 국가의 명예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드러난 경기 결과 이면엔 저마다 풍성한 스토리가 매달려 있다. 기록은 역사가 되고 뒷이야기는 전설로 남는다. 그러기에 승자도 패자도 눈물을 쏟는다. 간절함과 애석함이 교차되는 곳이 바로 올림픽 경기장이다.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이탈리아군 전 병력이 필요했지만, 로마는 단 한 명의 에티오피아 하사관에 의해 점령당했다.”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에서 아베베 비킬라(Abebe Bikila)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전 세계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마라톤에서 흑인이 우승한 전례가 없어 흑인은 장거리에 약하다는 속설이 있었는데 이를 뒤집었고, 당초 출전하기로 된 선수가 무릎을 다쳐 못나오게 되자 대체 출전한 무명 선수가 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어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기 때문이다. 특히 주최국 이탈리아 언론은 경악했다. 1935년 독립 왕정국가이던 에티오피아를 침공해 점령했던 제국주의 흑역사의 전과가 있었기에 마치 에티오피아가 그 복수를 자국 수도 로마에서 벌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것도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으로 말이다. 에티오피아 셀라시에 황제의 친위대로 근무하던 아베베는 6·25 전쟁 중 에티오피아 칵뉴부대의 하사관으로 참전한 이력도 있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가장 먼저 나온 금메달의 주인공은 한국의 여고생 사격선수 여갑순이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의 금메달 주인공도 대한민국이었다.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의 영웅’으로 등극하며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다. 이날 새벽 뜬눈으로 마라톤 경기 중계 장면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몬주익 경기장을 향한 내리막 구간에서 일본 선수를 추월하며 독주하던 황 선수의 당당한 모습에 열광했다. 아침 출근길 뿐 아니라 온종일 마라톤 우승의 감격으로 보냈다. 당시 대선을 몇 달 앞두고 정치권에선 여야의 첨예한 선거전과 정쟁이 이어졌으나, “국민들이 이렇게 기뻐하는데 오늘 만큼은 정쟁을 자제하자”며 여야가 휴전했다. 그때는 정치도 낭만이 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프랑스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리러 갑니다.”
이번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여자 유도 허미미 선수가 던졌던 출사표다. 개인전 은메달과 혼성 단체전 동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올랐으니 이 말은 현실이 됐다. 국경을 넘나든 어려움 속에서도 첫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하며 ‘한국 여자 유도의 간판’으로 우뚝 선 허미미 선수의 인생사가 주목받고 있다. 허 선수는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 지사의 후손(5대손)이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삼국유사면 출신인 허석 지사는 일제강점기인 1918년 8월경 군위군 의흥면으로 통하는 마을 근처 도로 곁에 세워진 비석에 동포들의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붙였다가 옥고를 치렀고 1920년 출옥 후 3일 만에 순국했다.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허미미 선수는 유도 선수였던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해, 일본 전국중학교유도대회 여자 52㎏급 우승, 일본 카뎃유도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승승장구했다. 허 선수의 인생행로를 바꾼 것은 할머니의 유언이었다. 2021년 작고한 허 선수의 조모는 손녀에게 “한국 국가대표로 선수 생활을 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허미미 선수는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바로 한국행을 택했다.
태극마크를 단 팀코리아 젊은 선수들의 투혼이 이국의 하늘을 수놓고 있다. 가슴졸이며 우리 선수들의 선전과 승리를 기원하는 순간 만큼은 모든 국민이 한마음 한뜻이다. 국민에게 일체감과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것에 스포츠만 한 것이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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