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가수 마츠다 세이코 노래 불러
의상·버릇까지 재현…양국 뜨거운 반응
과거와 달리 요즘은 日 대중문화 향유
韓 관광객, 日 관광산업에 영향 줄 정도
일본인 40% “한국에 호감 있어”
‘세계가 함께 만드는 콘텐츠’ K팝
다양한 문화와 콘텐츠를 연결시켜
창조하는 ‘혼종문화 상징’될 수도
일본의 ‘영원한 아이돌’이라 불리는 ‘마츠다 세이코’의 명곡 ‘푸른 산호초’의 첫 소절 가사이다.
이 곡은 1980년 일본 경제가 최고점에 이르렀던 시대에 나온 곡으로 그 당시 미국을 비롯한 많은 선진국들이 ‘일본을 배우자’라고 말하던 시기와 ‘버블경제’가 붕괴되기 직전, 가장 풍요로웠던 일본의 시절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이 노래가 2024년 소환되어 한국과 일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이렇게 만든 주인공은 걸그룹 ‘뉴진스(NewJeans)’의 멤버 ‘하니’이다.
‘뉴진스(NewJeans)’는 지난 6월 26~27일 도쿄돔에서 팬미팅 ‘버니즈 캠프’를 개최했는데 그 절정의 순간이 바로 ‘푸른 산호초’를 커버(cover)한 ‘하니’의 솔로 무대였다. 일본어로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일본 도쿄돔 지붕이 터져나갈 듯한 관객들의 뜨거운 함성은 젊은 시절 ‘마츠다 세이코’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하니’가 만든 것이었다. 특유의 청순함과 상큼한 매력은 물론 헤어스타일(일명 ‘세이코짱 컷’)과 마린룩 의상, 그리고 ‘마츠다 세이코’의 귀를 넘기는 버릇까지 그대로 재현한 ‘하니’의 디테일은 도쿄돔을 넘어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다. 일본의 중장년 남성들까지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는데 그들에게 ‘마츠다 세이코’는 영원한 첫사랑이자 그녀의 노래 ‘푸른 산호초’는 일본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노스탤지어’가 담긴 노래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반응도 뜨겁다. 유튜브를 통해 ‘마츠다 세이코’ 무대 영상이 화제가 되고 노래방 일본곡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번 ‘뉴진스’의 일본 데뷔가 한일 양국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약화시켰다는 견해도 있다. 과거에는 조금만 일본 색채가 나도 ‘왜색시비(倭色是非)’가 일어나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한일 양국의 대중문화 왕래가 잦아졌고 K팝 아이돌의 일본 데뷔와 공연이 많아졌다. 특히 올해 MBN에서 방영된 ‘한일가왕전’과 ‘한일톱텐쇼’는 ‘트로트’와 ‘엔카’의 공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제 한국방송에서 일본노래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방송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점은 한·일 간 대중문화 교류가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트로트는 최근 K-트로트 흥행에 힘입어 일본의 엔카와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고 있으며 과거 J팝의 후발주자였던 K팝은 글로벌 음악 시장의 중심이 되어가고 있다. 과거 세대가 ‘반일’(反日) 정서와 ‘약소국 콤플렉스’ 속에서 일본을 바라봤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들은 일본에 대해 약소국 콤플렉스도 없이 당당하게 우리의 대중문화와 일본의 대중문화를 함께 즐기며 향유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우리나라의 20~30대 중 60%가 일본에 호감이 있다고 응답했고, 40%에 가까운 일본인이 한국에 호감이 있다고 응답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흑역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거리를 삼가게 한다’는 ‘징비록’(서애 류성룡)처럼 말이다. 그러나 지난날 ‘반일’(反日)만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었다. ‘극일’(克日)만이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해방 후, 상당기간 동안 일본에게 핵심 기술을 배우고 차관이나 외자도입 등에 의지했지만 현재 우리나라는 구매력 평가 기준 임금과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선 이미 일본을 앞섰고, 1인당 명목 GDP도 곧 추월한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확실히 ‘극일’(克日)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일본과 같은 눈높이로 볼 수 있는 위치까지 대한민국은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한때 일본인 부자 관광객 유치에 사활을 건 적이 있었던 우리나라는 이제 한 해 7백만 명씩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가고 있다. 역대급 엔저라는 호재가 있었지만 특유의 가성비를 따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해외여행 성향을 고려한다면 분명 무시하지 못할 수치이다. 중요한 점은 우리나라가 일본 관광산업과 내수 시장에 영향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노 재팬(No Japan)’ 구호나, ‘죽창가’를 외치며 정신 승리에 집착하는 정치인이나 사회적 리더들이 꽤 많다. 또, 한·일 간 정치 이슈들이 생길 때마다, 사안의 경중과 관계없이 무조건 반일’(反日)로 대응하는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아직까지도 한·일 관계를 냉정하게 미래지향적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일제 식민지 시절 관련, 역사책을 읽거나 영화·드라마를 볼 때 피를 토하는 심정을 느끼지 못하는 국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감정만으로 한국과 일본의 모든 관계를 바라볼 수는 없다. 분노는 올바른 의사결정을 저해하고 당파심이나 계파에 의지한 ‘아집 정치’가 나라의 대사를 그르친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배운 바 있다.
임진왜란(1592년) 전, 일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자주 들어왔다. 이에 대해 조정은 통신사를 보내 일본 상황을 파악하기로 결정하고 서인(西人)인 황윤길을 정사로, 동인(東人)인 김성일을 부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바로 만날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피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를 만나고 돌아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내용은 극과 극이었다.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김성일은 ‘왜적이 침범해 올 기미가 없다’고 단언하였다.
또, 선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상에 대하여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빛나고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보였다’고 말한 반면, 김성일은 ‘눈이 쥐와 같으니 두려워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고 비하한 태도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사로잡혀 일본의 실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의 내심이 있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정치적 적대세력이었던 서인(西人)의 의견에 동조할 경우 국정 주도권을 서인(西人)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본의 조선정벌론’을 무시했다는 의견들이 있다는 점에서 ‘당파심’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들이 진영 논리에 갇혀 있으면,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민주적으로 토론하는 정치문화가 사라진다. 그 결과 진영에서 정한 이념만 확대 재생산하게 되어 결국 국익보다는 진영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망국적 정치구조를 만들게 된다.
이제 K-POP은 한국인만의 것이 아닌 글로벌이 함께 만드는 콘텐츠가 된 듯하다. 한국인이 아예 없는 K팝 그룹도 있고 한국에서 활동하지 않는 K팝 그룹이 생겨날 정도로 우리나라 대형 기획사들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미국, 유럽 등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K-POP 시스템과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호주·베트남 이중국적의 한국 걸그룹 가수인 뉴진스의 ‘하니’가 ‘도쿄돔’에서 부른 ‘푸른 산호초’는 이제 특정 국가와는 상관없는 글로벌 국적의 콘텐츠가 될 듯하다. 향후 정식으로 ‘하니’의 목소리로 리메이크(한국어·영어·베트남어·일본어 버전)된다면 ‘하니’의 모국인 베트남이나 호주뿐만 아니라 뉴진스의 팬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도 이 노래가 유행할 공산이 크다.
이런 점에서 K-POP은 향후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와 콘텐츠를 ‘협력’과 ‘연결’의 방식으로 융합하여 모방과 창조가 동시에 일어나게 하는 ‘혼종문화’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즉, 호환이 되는 문화와 다양성이 용인되는 글로벌 콘텐츠 시장이 만들어진다면, 대한민국은 문화콘텐츠라는 ‘소프트 파워’로서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어쩌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라고 말한 백범 김구의 소원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다.
윈스턴 처칠은 “힘을 동반하지 않은 문화는 내일이라도 당장 사멸하는 문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K팝을 비롯한 한류 콘텐츠가 ‘강한 문화’의 원천이 되어 세계 최고의 ‘소프트 파워 국가’가 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앞당겼으면 좋겠다.
칼럼니스트 이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