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 현대미술 범주로 치환
병풍 제작 땐 높이 4m 길이 50m
숱한 좌절 겪고 ‘조화·균형’ 결실
한글의 자음이나 모음을 뿌리와 줄기로 삼아 매화가 만발했다. 서상언 작가의 ‘매화도(梅花圖)’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한 애민정신의 표상이며, 아름다움과 희망을 상징하는 매화는 조선시대 수묵화의 단골 소재였다. 서상언은 인간과 자연을 사랑하는 한국인 특유의 인문정신을 대표하는 상징들인 한글과 매화의 만남을 시도했다. 이유는 21세기 버전의 ‘매화도(梅花圖)’를 창작하기 위함이다. 2년간 심혈을 기울여 창작한 그의 ‘매화도’는 18일부터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 ‘한글, 매화도 大作’전에 걸린다.
신작 ‘매화도’는 수묵화의 환골탈태에 매진한 결과다. 그는 지금까지 수묵화가 전통미술이라는 고정관념을 불식시키고, 현대인과 감응하기 위한 여정에 열정을 할애했다. 수묵화를 한국을 넘어 세계인의 보편미감으로 치환하겠다는 결기가 있었다. 이른바 전통 수묵화의 재해석인데, 그는 서예를 해체하고, 수묵화에 현대의 사회상을 접목하고, 수묵화와 소금의 만남 등을 시도했다. 그 연장선에서 한글과 매화의 만남이 주선했다.
“기존의 수묵(문인화. 수묵화)이 가지는 패러다임을 건너가고자 하는 시대의 소명으로 보고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바 없는 다름으로 한글의 자음 모음을 매화도(梅花圖)로 표현하는 발상을 하게 됐습니다.”
수묵화를 현대미술의 범주로 치환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전통예술이 가지는 한계에서 발동됐다. 전통이 전통에만 머물면 무덤 속의 예술과 무엇이 다르냐는 문제의식이었다. 그는 수묵화에 현대성을 확보하는 것으로 변화의 단초를 찾았다. “현재의 수묵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현대에는 답이 없다”는 현실인식으로, “수묵을 현대에 관점에서 보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때 그의 뇌리를 울린 것이 ‘우주’였다. 그는 한지에 먹과 소금의 결합을 시도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순수로 점철된 광활한 우주를 형상화했다.
한글과 매화의 만남 역시 우주를 향한 그의 세계관의 결실이다. 그의 우주관은 불교는 태초에 우주는 성음의 세계라고 했고, 기독교는 성경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는 역사성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그 태초의 세계인 우주와 한글을 연결지으며, 태초이자 근원으로서의 수묵화를 모색했다. “한글이야말로 소리나는 대로 만든 성음이자 우주의 소리”라는 확신에 따른 것이다.
한글과 우주의 소통이라는 주제는 서사를 갖췄지만, 어떤 방식으로 시각화할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지금까지는 우주의 운석과 은하 등에 소통의 상징으로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표현했다면, 이번 전시에선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나무와 매화꽃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막상 의도대로 표현하자 쾌재를 불렀다. 그가 그토록 찾았던 ‘새로움’과 ‘창의성’이 화면 가득 묻어났던 것. 애초에 가장 과학적이며, 근원적인 한글에서 그가 궁극으로 찾는 것 역시 현대성이었다. 그중에서도 예술가로서 그가 지향하는 ‘새로움’을 한글에서 발견한다. “‘매화도’를 그리고 보니 제 안에 이런 발상이 들어왔다는 것에 큰 희열을 느꼈습니다.”
광활한 우주를 표현한 만큼, 작품의 규모 또한 대작들이다. 전시작들을 모아 병풍으로 제작하면 높이가 4m, 길이가 50m가 될 정도다.
대작인 만큼 시행착오도 겪었다. 글자의 크기와 구도, 먹의 농담과 번짐, 꽃의 색과 크기, 한지와의 관계 등에서 좌절도 맛보았다. 결국 고군분투 끝에 조화와 균형의 미학을 발견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한지에 붓과 먹, 물, 물감을 조화롭게 하고, 자음과 모음의 구도와 디자인은 기하학적이고 섬세하게 표현됐다. 대형 한지는 인간무형문화재 이자성 한지장 선생이 특별 제작 했다.
“현대수묵으로 가는 여정에 현대미술의 개념미술과 동시대미술에 있어 수묵과의 접목을 어떻게 시도하고, 나아가 우리의 혼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현대수묵을 찾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번 전시는 그 여정에서 길어 올린 결실들입니다.” 전시는 22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