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주의에 기초한 차별화 정책 펼쳐
자본주의 초기 발전 단계서 올수 있는
시장경제 정치 개입·정치 부패 피해가
경제학자와 정치학자들을 괴롭히는 오래된 화두는 시장경제의 원칙하에 국가의 경제를 성장시키기 위해 국가의 개입은 어느 선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양립할 수 있는가이다. 한국현대사를 경험했거나 조금이라도 공부하신 분들이라면 이 질문에서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은 한국의 기성세대라면 모두가 겪으셨을 냉전시대와 빈곤시대 이후의 눈부신 고속성장과 함께 만들어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스스로의 정의(定義)를 내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세계경제발전사에 유례가 힘들 정도로 그 결과가 혁명적이었던 한국의 경제발전사는 역설적으로 가장 빈곤했던 냉전시기에 그 시작을 알렸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한국의 토종 경제학이라고 한다면 그 이후 많은 정권이 바뀌며 성장에 반하는 많은 분배정책들과 비교했을 때 박정희의 그 당시 정책들은 오늘날과 비교해 보아도 그 세련됨이 돋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많은 경제정책들의 성공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되는데 첫째, ‘경제적 차별화 원리’, 둘째, ‘정치의 경제화’, 셋째, ‘기업부국 원리의 실천’등으로 요약된다.
◇ 경제적 차별화 원리
박정희는 그의 집권기간 동안 가장 강조한 원칙이 신상필벌 이었다. 이런 시장의 기능을 정책에 직접 반영함으로써 후진국의 경우 여러 가지 이유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시장의 차별적 선택기능을 보안하여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시장의 영역을 넓혀 나간 것이다. 그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항상 낮은 성과보다도 좋은 성과에 보상해야 한다고 경제인들은 물론 국민들에게도 강조하고 실천하였다.
5.16혁명이후 10년 가까이 ‘재건국민운동’을 통해 농어민 등 국민의식 개혁운동을 추진했고 그 성과가 미흡했음을 경험한 박정희 대통령은 각 개인들에게 근면과 자조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새마을지도자들에 대한 자조정신교육을 항상 강조하면서도 현실적인 인센티브정책으로 자조의 결과인 성과를 강조하고, 이에 상응하여 지급을 차별화해야 자조정신개혁의 동기가 극대화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이런 관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차별화 정책들은 (1) 수출우수기업에 우선적으로 지원을 강화한 수출육성정책, (2) 수출우수기업 등 능력 있는 우량기업들의 중화학공업 참여를 인센티브장치를 통해 장려한 중화학공업 육성대책, (3) 성과 높은 마을에 더 많은 지원을 한 새마을 운동, (4) 수출성과가 있는 공장을 더 많이 지원한 새마을공장 육성정책 등이 특기할 만하다.
물론 그 외에도 인재를 발굴 등용함에 있어서나 과학기술인재 육성 등 교육에 있어서나, 수월성을 필요로 하는 다른 모든 정책들에 있어서도 기본적으로 차별화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부에 의한 시장개입을 소위 관치경제라고 비판하지만 역설적으로 정부에 의한 차별화 정책이 국민들의 수월성 경쟁을 촉발함으로써 한국경제의 도약을 가져왔다고 아니할 수 없다.
흔히 ‘개발독재’ 타이틀로 박정희 폄훼
세계 어떤 독재가 기술 집약적 산업을
시장 논리로 전환하는데 성공했는가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 평가해야 옳아
◇ 정치의 경제화
경제적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의 차별화가 경제발전에 필수적이지만, 실제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아쉽게도 표에 의해 경제정책을 결정하게 되기 때문에 시장의 경제적 차별화 기능에 역행하는 정책과 제도를 양산할 위험이 내재해 있다. 이것이 바로 포퓰리즘(Populism) 정치의 배경이다. 1인 1표의 정치적 평등아래 정치가 표를 통해 경제정책을 결정하게 되면 경제적 평등추구가 ‘경제의 정치화’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때로는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이라고 평가하기도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바로 이것이 경제적 차별화정책의 정치적 왜곡을 막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즉 박정희의 권위주의 정치는 경제적 차별화 원리를 실천하는데 있어 낮은 성과에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평등주의적 포퓰리즘의 여론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는 의미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의 정치화를 차단한 사례는 새마을운동이 2년차 되는 시기인 1971년 지원계획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1차 년도의 마을 간의 성과차이에도 불구하고 평등지원을 고집하는 각료 및 국무회의에서의 주장들을 여러 번에 걸쳐 물리치고 스스로 도운 ‘우수성과 마을’만 지원하는 정책을 결정한 박정희 대통령의 결단이 돋보인다. 이때 박정희 대통령은 차등 지원의 정치적 불리함 때문에 평등지원을 주장하는 집권당의 당료들에게 정권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차별적으로 지원을 강조했다.
이는 아마도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물론 독재 국가에서마저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박정희는 정치를 경제화 하여 경제적 차별화 정책 원리를 지켜냄으로써 한강의 기적을 실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경제발전에 성공한 국가들은 한결같이 정부가 경제제도와 정책으로 시장과 기업의 경제적 차별화 기능을 활성화 시킨 나라들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 정부주도의 소위 관치경제하에서도 엄격한 차별화 원리를 적용시켜 경제발전의 기본원리를 실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정부가 나서서 잘하는 농촌지역을 차별화 하는 전략은 관치의 차별화 전략이라고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작동원리가 가져올 역동성을 예상했던 것이다.
오늘날 아무도 새마을 운동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평등주의 함정에 빠진 전 세계의 많은 국가들에게 대한민국 새마을 운동의 사례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교훈임에 분명하다.
◇ 기업부국의 실천과 사유재산권
박정희 시대에는 상업에 종사 하든 제조업을 하든, 상인들이 대접받는 시대였다. 과거 조선조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급이념 속에 사대부의 위세에 눌려 천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일제하에서는 일본인들에 비해 또 다른 형태의 차별을 받았던 상인 혹은 기업가들과 과학자 및 기술자 그룹들이 박정희식 상공농사(商工農士)의 새로운 계급이념 속에서 산업화의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다.
이미 전설이 된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기라성 같은 기업인들이 박정희식 성과주의에 기초한 차별화 정책에 힘입어 중소기업 및 대기업으로 도약하는데 20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경제에 견인차 노릇을 하는 기업들이 거의 모두 박정희시대 차별화 구조에서 성장한 기업들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농경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시장 교환 경제체제하에서 살았으나 지속적인 소득의 성장을 가져온 경제발전 현상은 300년이 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국가들을 제외하고, 선진국과 후진국들 모두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해 왔지만 결과는 저성장과 양극화라는 현상에 직면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은 자본과 기술이 전무하고 노동력 밖에 없는 환경에서 다른 선진국들이 100~200년을 넘어 수백 년 걸린 한국형 산업혁명을 이뤄냈으니 박정희의 차별화 전략을 주류 경제학에서 설명하기에도 불가능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자세히 보면 기업은 시장과 달리 의외로 ‘수직적 명령체계’를 본질로 하는 조직이다. 시장처럼 자발적 합의교환 방식이 아닌 명령에 의한 자원배분 방식에 의존함으로써 거래비용을 피하거나 절약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기업은 거래비용 때문에 시장거래가 가능하지 않은 영역에까지 새롭게 거래의 영역을 확대·발전시킴으로써 시장의 확대와 경제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다.
오늘날 기업경영의 성공요체가 바로 기업 내부자원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경제적 차별화를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경영학 원리는 이미 상식이 되었다. 19세기 이후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경험을 살펴보면 바로 새로운 주식회사 제도를 잘 발전시킨 나라는 국부창출에 성공하고, 더 나아가 세계경제 패권 싸움에서도 성공하였다.
오늘날 현대식 주식회사 기업제도는 바로 농경사회의 영세한 대장간 기업에서 창발 하여 잠재적 자본규모와 위험부담 능력이 무한대로 확대된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견인차이다. 자본주의 경제발전은 이런 주식회사제도의 발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영국의 산업혁명, 미국의 영국 추월, 일본의 선진화, 한국의 한강의 기적들 모두 현대식 기업의 성장을 앞장세워 발전한 역사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 박정희 모델의 세계성과 보편성
박정희 경제학은 그 동안 국내 주류경제학계도 인정하듯 여전히 유효한 살아있는 경제학이다. 공산주의 · 사회주의나 수정자본주의가 놓쳤던 진정한 자본주의의 본질을 온전하게 통찰하는 “보편적 발전관”을 담고 있다. 따라서 시공을 넘어 자본주의 발전의 양상을 설명할 수 있는 세계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경제번영을 구가했던 나라들은 방대한 자국영토와 식민지영토를 가지고 농업을 전문화 했던 나라들보다, 국제무역을 통해 상인자본주의를 활성화했던 나라들이었으며, 네덜란드와 영국 등이 이에 해당한다. 나아가 영국이 상인기업의 나라에서 19세기 주식회사 기업제도를 적극 활용하여 산업혁명을 일으켜 세계를 경영하는 산업자본주의를 선도하고, 이를 따라한 미국이 거대 주식회사 기업들을 앞세워 20세기 이후 줄곧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자본의 축적여부에 따라 인류가 극복하지 못한 계급사회의 전통이 깨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자본주의 발전을 주도한 국가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상인과 기업들이 경제번영을 주도하며 애덤 스미스가 말한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 으로 부를 창출하고 일자리를 만들어 농토 위의 궁핍한 농민들을 흡수하여 중산층을 육성함으로써 자본주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었던 농경사회에 비해 동반성장을 가능케 할 수 있었다. 시장과 정부가 성공하는 상인과 기업들에게 기회를 열어줌으로써 기업들이 자본주의경제의 창발을 주도한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에서 중상주의를 중금주의(重金主義)나 보호무역주의와 동일시하여 비판하고 자유방임적 시장중심 사상을 주창하였지만, 인류역사는 불행히도 상공업 육성을 통해 국부를 팽창시키는 과정에서 부득이한 식민지 경영의 좋지 못한 사례들을 양산해 순수한 경제발전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국부증진과 식민지 착취가 동일선상에서 확대되는 악순환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순수한 교환경제가 국가 간의 무력충돌을 항시 가져올 수 있다는 위험성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발전 모델은 기업들 사이에 열린 경쟁을 통해 상공업을 육성하는, 보호주의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기업의 상공업 활동을 장려하는 열린 중상주의 및 산업화 전략을 통해 경제발전의 필수 과정은 보호무역 보다 세계시장을 향한 열린 개방무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인기업의 활동을 장려하는 중상주의는 농경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경제발전 과정이었고 뒤를 이은 제조기업의 육성장려를 통한 산업혁명은 자본주의 고도화를 위한 경제발전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흥미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은 바로 이런 세계 자본주의경제 발전의 천여 년의 역사를 20여년 만에 그대로 재현하였다. 한국의 60년대 10년 동안, 수출주도 성장이라고 불린 경공업 수출 성공은 베니스에서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진 상인 → 경공업주도의 산업혁명 과정을 재현한 셈이며, 70년대 10년간의 중화학공업화 성공은 영국의 19세기 이후의 본격적인 산업혁명과 20세기 이후 미국, 독일로 이어진 중화학공업화라는 공업 구조의 고도화 과정을 재현한 셈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을 앞세워 세계시장을 개척하고 이를 지원하기위해 과학자와 기술자를 육성하여 중화학공업을 육성함으로써 제조업의 고부가치화를 통한 국제경쟁력 향상을 적극 지원하였다.
1964년 1억 달러의 수출에서 1977년까지 100억 달러로, 단 13년 만에 100배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결코 박정희 대통령이 포기하지 않은 원칙은 바로 정부는 ‘스스로 돕는 개인과 기업을 돕는다.’는 신상필벌의 경제적 차별화 원리였다.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자칫 자본주의 초기 발전 단계에 올 수 있는 시장 경제의 정치개입과 그에 따른 정치적 부패를 피해갔다.
대한민국 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했던 다른 제3세계국가들이 성장과정에서 성장이 멈추는 이유가 바로 정치부패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본인 스스로의 청렴함을 뛰어넘어 시장과 기업과 정부의 역학관계에 있어 정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므로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보편적 원리를 충실하게 따랐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업이나 정부의 역할을 경시하는 자유방임적 시장중심의 현대 주류경제학이나 역으로 시장과 기업을 경시하고 정부의 계획과 명령만을 따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 등은 철저히 이질적인 이론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흔히들 박정희 대통령을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고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개발독재’라는 타이틀로 폄훼한다. 필자가 확실히 주장 할 수 있는 것은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결코 ‘개발독재’로 평가 될 수 없다. 전 세계 어떤 독재가 신상필벌의 철저한 시장논리로 지지자들과 정치적 동반자를 관리할 수 있겠는가? 전 세계 어떤 국가가 빈곤상황에서 중화학공업과 같은 고도의 기술 집약형 산업을 육성하여 시장 논리로 전환시키는데 성공하였는가?
박정희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라고 평가해야 옳다. 냉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60년대와 70년대 박정희의 빈곤탈출 계획은 오늘날 모든 선진국들이 완벽히 소화시키기도 어려운 다양한 산업에 성공 밑거름을 창출해냈다. 이 ‘오래된 미래, 박정희’라는 화두는 오늘날 분배이론의 딜레마에 빠진 세계 경제 발전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글=박정희아카데미 부속 박정희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