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손들이 뜻 기려 ‘사도실’ 명명
그의 저서 속자치통감강목 판목
경북도 ‘유형문화유산’ 지정
차는 기다림의 미학을 알려준다. 빠름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차를 준비하고 우려내는 몇분의 시간이 답답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매우 귀중합니다. 오늘은 내가 나를 대접하는 날입니다.” 작은 찻상을 앞에 두고 앉아 배우경 다례원장이 이끄는대로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본다. 성주군 대가면 사도실마을에서 만난 선물같은 시간이다.
사도실마을은 600여년을 이어온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대과급제자가 5명이나 되고, 심산 선생을 비롯해 독립운동가를 5명이나 배출한 유서깊은 마을이다. 마을 앞을 흐르는 사천(沙川)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칠봉산 월명봉(月明峰)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서 사월(沙月)이라 부르다가 동강 김우옹 선생의 후손들이 도덕과 윤리를 사모한 선생의 뜻을 기려 사도실(思道室)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에 들어서면 태극기 그림 아래 ‘晴川書院’(청천서원)이라고 한자로 새겨놓은 거대한 입석이 눈에 띈다. 뒤편 언덕 위로 청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의 ‘세심교’(洗心橋)를 지나 서른개 남짓한 계단을 오르면 ‘올바름을 지킨다’는 의미의 수정문(守正門)에 다다른다. 문 앞에서 잠시 뒤를 돌아보면 칠봉산 자락에 안긴 20여호 남짓한 조용한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청천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로 정치적, 학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김우옹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1729년(영조5)에 창건되었다. 고종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2년에 지금의 자리에 복원됐다. 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인 동강 김우옹(1540~1603) 선생은 한강 정구(1543~1620) 선생과 함께 성주권의 양강(兩岡)으로 알려져 있다. 강당인 일중당에 걸려있는 청천서원 편액은 백범 김구 선생의 글씨다.
수정문 옆에 자리한 경정각에는 김우옹 선생이 저술한 속자치통감강목을 판각한 속자치통감강목판목(경북 유형문화유산)이 보관되어 있다. 속자치통감강목은 1589년 기축옥사로 유배를 떠난 선생이 중국 송나라 태조 원년(960)에서 명나라 태조 원년(1368)까지 408년 간의 중국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다. 36권 20책의 분량을 673매의 배나무 목판에 새겨 보관중이다.
한옥체험카페 ‘청담 1942’ 운영
전국서 잇단 방문, 지역에 ‘활기’
산에서 채취한 꽃·열매 등 활용
해방 후 한때는 100가구가 넘을 정도로 번성했던 마을에는 현재 20여가구 30명 남짓한 주민만이 남아있다. 주민의 평균연령도 65세를 넘어서며 마을의 소멸을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마을이 가진 유·무형의 자산을 널리 알리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도록 하기 위해 주민들이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한 끝에 지난 6월 청천서원에 한옥체험카페 ‘청담1942’를 열었다.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우려의 소리도 있었지만 무조건 문을 닫아걸고 보존하는 것보다는 많은 이들이 드나들고 이용해야 더 빛이 나고 오래간다는 것에 주민들의 뜻이 모아졌다.
‘맑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淸談)이라는 이름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심산 김창숙 선생이 마을로 돌아온 해인 ‘1942’라는 숫자를 더했다. 카페 이름에 마을에 대한 자긍심이 그대로 녹아있다.
지난 2022년 지역주민들이 지역 고유의 특색을 지닌 관광사업체를 창업하고 경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관광두레주민사업체에 선정이 되면서 카페 운영의 첫 발을 뗐다. 관광두레주민사업체가 되면 5년간 최대 1억1천만원의 지원금과 함께 메뉴 개발부터 브랜딩, 공간디자인과 홍보컨설팅 등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동안은 예약제로 꽃차티백만들기, 건강환 만들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차곡차곡 준비를 해오다 3년차인 올해 카페문을 활짝 열고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했다.
짧은 시간 안에 분위기맛집, 뷰맛집, 사진맛집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카페를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핫플을 찾는 젊은이와 가족단위의 방문객들이 많이 찾는다. 가까운 대구, 경북 지역은 물론 서울, 부산, 진주 등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요즘은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나”면서 성주군민들도 많이 찾는다.
주문을 하면 직접 다식을 만들어 찻상을 차려내는데까지 시간이 걸린다. 성격급한 이들은 왜 빨리 안나오냐고 답답해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막상 찻상을 마주하면 ’기다릴 만하다‘며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휴대폰을 꺼내들고 사진찍는 손길도 바빠진다.
카페에서 제공되는 꽃차는 가야산에서 나는 꽃, 열매, 뿌리 등을 직접 채취해서 가공해서 만든다. 가야산의 사계절을 차로 만날 수 있다. 마음이 불안할때 ‘청천 살으리랏다 티’, 피로한 당신의 하루, 활기를 넣어주는 ‘청천 호랑이기운 티’, 따끔따끔 기관지 말끔하게 ‘청천 화통티’ 등 이름도 재미있는 블렌딩티에 블랙푸드환을 포함한 6종의 다과가 포함된 한상차림은 제대로 대접받는 느낌이라 인기다. 명품 성주참외를 활용한 참외플라워티, 참외 크림티도 이색적이다. 2시간 동안 백차, 녹차, 보이차 등 6가지 차와 다식을 즐기며 다례를 배우는 청담티코스는 예약제로 운영된다.
카페에서 잠시 여유를 즐겼다면 마을 탐방에 나설 차례다. 카페를 찾아 마을을 방문한 이들이 자연스럽게 마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 청천서원에서 조금 걸어내려가면 심산 김창숙 선생의 생가인 심산고택이 있다.
동강선생의 13대손인 심산 김창숙(1879~1962)선생은 일제강점기에는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하고 임시정부 부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치고, 광복 후에는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 운동을 하는 한편,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해 초대총장을 지내는 등 민족사학 육성에 힘을 쏟았다.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두 아들을 잃고 일본군의 고문에 다리가 마비된 채로 1942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생가는 선생의 며느리가 지켜오다 지금은 비어있다.
심산고택에서 대각선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청천서당이 있다. 경북 유형문화유산인 청천서당은 청천서원이 훼철된 후 김우옹의 12대손이자 심산의 아버지인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서당으로 활용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심산 선생이 1910년 서당을 성명학교로 바꾸고 신학문을 가르치며 애국계몽활동을 펼쳤다. 지역의 유생들은 “심산때문에 유림이 망한다”며 신학문 교육에 반대를 했지만 선생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심산 선생의 정신과 사상을 담은 심산문화테마파크가 사도실마을 건너편 칠봉산 기슭에 조성 중이다. 내년 봄 1단계 사업 준공을 앞두고 있는 심산문화테마파크는 체류형 웰니스 관광명소로, 그곳을 거점으로 관광객들이 머물면서 성주의 가야산, 성주호, 포천계곡 등 아름다운 풍광과 한개민속마을, 세종대왕자태실, 성산동 고분군 등 역사적 유적도 즐길 수 있어서 앞으로 성주관광산업의 중심지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 중심에 선비정신과 애국정신이 깃든 사도실 마을이 있다.
추홍식·배수경기자
[우리 마을은]
김민수 대표 “전통·현대 접목한 카페, 마을의 상징”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들도 있지만 아낀다고 문을 닫아놓으면 오히려 금방 못쓰게 됩니다. 매일 사람이 드나들고 청소하고 환기하면 더 오래 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감탄하는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주민사업체 ‘청담1942’ 김민수 대표가 몇년 전 처음 청천서원에 들어섰을때는 허리께까지 자란 풀이 숲을 이루고 있었고 말벌과 박쥐가 집을 짓고 살고 있을 정도로 방치가 되어 있던 곳이었다. 문중 어른인 김윤철 전 관악문화원장의 지원으로 주변을 정비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깔끔하게 단장된 모습의 서원을 그냥 두고 보기보다는 여럿이 함께 나누는 길을 찾아 카페를 열었다.
김우옹 선생과 심산 선생의 자취를 찾아 마을을 방문한 이들이 잠시 눈으로 보고 지나가던 공간이 다도와 예절교육 등 직접 체험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 더욱 의미가 있다.
김 대표는 전통과 현대를 잘 접목해 마을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주민사업체 ‘청담1942’의 몫이라 생각한다. 그는 카페가 단순히 예쁜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 위해 찾는 곳이 아니라 한번 오면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곳과 차별되는 메뉴와 이야기로 자생력을 기르는게 급선무라 생각한다. 김 대표와 배우경 다례원장은 가야산에서 나는 식물의 꽃, 열매, 뿌리를 채취해 가공해 카페를 찾는 이에게 가야산의 사계절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또한 마을의 소중한 자산을 선뜻 내준 주민들에게는 쉼터와 여가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려하던 주민들도 이제는 주변이 잘 정비되고 관리가 잘 되어서 좋다며 반긴다. ‘청담1942’는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공간이다. 카페에서 마시는 차 한잔은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내가 나를 대접하는 소중한 시간을 선사한다.
심산문화테마파크가 완공되면 공원에서 출발해 서원까지 오는 트레킹코스도 만들 계획이다. 마을까지 느린 걸음으로 걸어오면서 참외하우스도 견학하고 쌀, 콩, 깨 등 마을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직거래할 수 있는 장터도 만들 계획이다. 이렇게 농가소득도 올리고 관광객들에게는 재미를 주고 카페도 활성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중이다.
배수경기자 micbae@idaegu.co.kr
[가볼만한 곳]
◇성밖숲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있는 성밖숲은 수령 300~500년으로 추정되는 왕버들 55그루가 모여있는 군락지로 천연기념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8월이면 오랜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왕버들의 신비로운 모습과 함께 나무 그늘 아래에 핀 보랏빛 맥문동을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201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공존상을 수상하고, 2018·2019년 대한민국 10대 생태테마관광지로도 선정된 곳이다.
◇ 성주 성산동 고분군
성주군 성산일대에 있는 성산가야지배층의 무덤으로 사적 제86호로 지정되어 있다.
2020년에 문을 연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에는 성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을 살펴볼 수 있는 상설전시실과 야외전시장, 어린이 체험실 등이 있다. 능선을 타고 이어지는 고분군을 탐방로를 따라 걸을 수 있고 8월에서 9월까지 2천여평의 부지에 활짝 핀 해바라기가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