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 (경복궁이 불타는 장면을 보며) 왜군이 벌써 도성에 닥쳤느냐?
신하1 : 아직 한강을 건너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조 : 아님, 누가 저렇게... 저기는 궁이 아니냐? 누가 경복궁에 불을 질렀냐고 묻지 않느냐!
신하2 : 전하 참람하옵게도 도성의 백성들이...
선조 : 내 백성들이... 아니 왜?
백성들 : 왕이 궁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참에 다 뒤집어 버리자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영화 <전,란>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임금(선조)은 도망가고 이에 분개한 백성들이 경복궁에 불을 질렀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선조수정실록과 문신 이기가 쓴 <송와잡설>의 내용이 이를 증명한다. 만주를 향해 도망치던 선조는 “적병의 숫자는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라며 어영대장 윤두수에게 물었다는 점에서 그 당시 선조와 지배층에 대한 백성들의 분노는 충분히 짐작된다.
그 후 선조는 평양 사수를 약속했지만 그것마저도 저 버린 채, 명나라에 망명 의사를 전달하고 압록강 근처 의주까지 몽진(蒙塵)한다. 심지어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명나라 요동에서 대접받고 사는 것이 본인의 뜻이라고 밝힌다. 이에 대해 류성룡 등은 요동으로 도망칠 경우, 조선은 영원히 우리 땅이 아닌 게 된다며 극구 만류했다. 왜군이 쳐들어 왔는데 임금은 도망가고 백성들은 궁에 불을 지르고 오히려 왜군에 합세하여 관군과 싸우게 되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엇을 잘못되었기에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 학봉 김성일이 올린 상소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군포(병역세)로 인해 도망가는 백성들이 너무나 많고 그 군포를 가족에게 대신 부담케 하는 병역연좌제 때문에 결국 마을 전체가 비어 그 원통함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문란해진 조세나 공납 제도와 탐관오리의 횡포로 민심은 더욱 흉흉했지만 무능한 선조와 사리사욕에 눈먼 지배층들은 이를 외면했다. 특히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가 면제되고 백성들만 군포를 부담하니 양인들은 기를 쓰고 양반이 되려 했고 몰락한 양인들은 노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런 사회적 모순들이 만든 분노가 왜군의 침략보다 더 뼈아팠을 것이다.
임진왜란 중 류성룡은 부족한 군병력을 채우기 위해 양반과 양인들로 조직된 속오군을 설치했고, 훈련도감을 만들어 양반과 양인, 공·사노비들까지 함께 복무하게 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그들의 노비들이 차출되는 것을 싫어했고 양인과 노비와 함께 섞여 훈련을 받는 것을 혐오했다. 그러나 전란에서 벗어나려면 인센티브는 필요했다. 왜군의 머리를 베어오면 천민도 양인이 될 수 있다는 ‘면천법’을 약속하자, 많은 천민과 노비들이 왜군의 머리를 베어들고 군영을 찾아왔다. 이런 점에서 임진왜란은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천민 출신의 김응서는 공을 세워 병마절도사가 되기도 했다.
선조, 임진왜란 공식 책봉 문제
무인보다 피난 도운 관료 우선
선무공신보다 호성공신 더 많아
다음 전쟁 때 의병들 활동 미비
이렇게 이순신 등 영웅들의 헌신, 명군의 참전, 의병의 활약 등으로 조선은 나라를 다시 찾았지만 공신 선정을 놓고 또 하나의 역사적인 실책을 범하게 된다. 선조는 자신과 의주까지 피난을 수행한 호성공신은 우대했지만 왜군과 싸운 선무공신은 홀대했다. 전쟁의 가장 큰 공은 마땅히 전장에서 싸운 무인들의 공인데도 말이다. 내시 24명과 말 관리사 등이 호성공신에 포함되었지만 선무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또한, 곽재우, 조헌, 고경명 등의 의병, 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의 승병, 그리고 논개 등 의인들은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에는 의병들의 활약이 미비했다. 임금과 나라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싸우면 ‘호구’되고, 임금을 잘 따라다녀야 공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유전은 선천적인 데 반해, 문화는 후천적으로 학습된다. 그래서 올바른 문화든 잘못된 문화든 후손들에게 전승된다. 특히 잘못된 문화가 하나의 사회적 기준이 되고 법칙이 되면 선조의 잘못된 공신 선정처럼 더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개인은 조직이나 사회의 문화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슈나이더가 ‘ASA(유인·선발·소멸) 이론’에서 말한 것처럼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조직 구성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직문화에 동화되는 자는 남고, 조직문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는 조직을 떠나게 된다. 문제는 조직문화가 올바르지 못해 인재들이 떠나는 경우이다. 즉 ‘인력의 그레샴 법칙’이 적용되어 무능한 자들은 지역 사회나 조직에 남고 유능한 자들이 지역 사회나 조직을 떠나게 된다.
지방은 네트워크 경쟁력 필수
'고인물 카르텔' 점령한 기업
인재와 투자금이 몰리겠나?
공정한 기회시스템 구축해야
이런 현상을 ‘티부 가설’(발로 하는 투표)에 적용해 보면, 공정한 기회와 텃새가 없는 지역에는 인재들이 모이고, ‘고인물 카르텔’이 지배하는 지역에는 사람과 돈이 모여들지 않게 된다. 사업하기 힘든 지방도시들의 공통점이 텃새가 심하고 인적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의견이 있다. 텃새가 심한 지역에 기업이 오지 않고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데 이것을 단순히 서울이나 수도권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톡톡 튀는 인재가 없고, 창의적인 인적자원이 드물며, 눈치 9단의 순응형 구성원들이 주류를 이루는 조직이나 사회가 성공한 사례가 있는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도시와 지방의 경쟁력이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지방의 도시들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네트워크 효과를 누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용성과 개방성을 갖춘 지역의 문화가 조성되어야 하고 인재를 유치·확보하기 위해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시스템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반대파 황희도 포용한 세종
능력 시험 후 다시 관직 등용
선진국·후진국 차이는 '신뢰'
신뢰 있을 때 조직·지역 발전
우리는 세종과 광해군의 상반된 사례를 통해 신뢰에 기반한 ‘포용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태종은 실덕과 악행을 이유로 세자 양녕대군을 폐위하려 했다. 그러나 황희는 양녕의 폐위를 극렬히 반대하여 태종의 눈 밖에 난다. 결국 황희는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전라도 남원에 5년 동안 유배된다. 세종은 즉위 후, 자신을 반대한 황희를 처벌하지 않았고 강원도 관찰사로 능력을 시험한 후, 의정부 찬성을 승진시켰고, 무한한 신뢰와 중용으로 황희는 ‘직업이 정승’이라는 별칭답게 세종의 정치적 파트너로서 승승장구했다. 광해군은 즉위 초에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대북파’만을 중용하지 않고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서인 이항복을 좌의정으로 삼는 등 당파를 초월하는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그 결과 대동법과 양전사업 실시를 통해 문란해진 조세·토지제도를 바로 잡았고 동의보감을 편찬케 하는 등 민생중심의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인목대비 폐모’라는 이념 논쟁에 휘말린 후에는 ‘대북파’만을 중용하여 연립정권을 무너뜨렸고 인조반정을 꾀한 서인들을 견제하지 못한 무능한 ‘대북파’에 의지한 결과, 결국 임금 자리에서 쫓겨나게 된다.
신뢰는 천천히 쌓이지만, 쉽게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 신뢰가 사회적 자본이 되듯이 불신은 사회적 의미의 악성 부채가 된다. 신뢰가 무너지면 우리는 역사를 통해 ‘전’과 ‘란’이 일어났수 있음을 배웠다. 호구를 양산하고 늘 배신당할까 두려워하는 조직이나 지역 사회보다는 ‘기대와 믿음’이 만든 신뢰 네트워크가 개인의 성장 기반이 되는 조직이나 지역 사회가 무궁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음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신뢰’이며 ‘신뢰 기반이 없는 나라는 사회적 비용의 급격한 증가로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한다’고 말했다. 역사 속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신뢰가 너무나 중요한 가치임은 선조실록에 나오는 이항복의 간언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싸움터에서 자신을 잊고 힘써 싸운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도, 이순신, 원균 외에는 고언백 1명만 공신에 책봉했으니 훗날 위급한 때 힘써 싸우게 요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칼럼니스트 이상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