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 국민의례 한다면서 묵념을 빼먹다니
<대구논단> 국민의례 한다면서 묵념을 빼먹다니
  • 승인 2009.03.17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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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 열 (한국정치평론가협회장)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먼저 갖춰야 할 예의가 조상을 잘 섬기는 일이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만들어준 분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금처럼 많은 이들이 더불어 살 수 있도록 해준 분도 조상이기 때문이다. 조상은 꼭 직계조상만을 일컫는 것은 아니며 이 나라의 모든 선조들을 모두 포함한다.

그들 중에는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몸 바쳐 일한 분들도 많다. 순수하게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서 일생을 산사람도 있지만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만도 후손들에게는 큰 후덕(後德)을 남기고 간 것이라고 봐야한다. 더구나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과감히 앞장에 나서 싸우다가 목숨을 버린 이들도 부지기수다.

어떤 때는 전쟁에 나갔다가 죽기도 했으며, 어떤 이는 외적에게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군사독재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어 고문으로 죽은 영혼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후손은 언제나 존경의 뜻을 표하고 그들의 유덕을 추모하며 살아있는 자의 결의를 다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크고 작은 기념행사가 있을 때에는 순서에 반드시 `국민의례’가 들어가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국민의례는 대부분 애국가를 봉창한 다음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올리고 끝으로 힘차게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종료된다. 제사를 올릴 때 초헌· 아헌· 종헌의 순서로 술잔을 올리는 것과 다름없다. 만약 초헌을 올린다음 아헌을 빼먹고 바로 종헌을 올린다면 제삿밥 얻어먹으러 왔던 귀신조차 질겁할 일 아닌가.

이러한 의례는 우리가 살아가는 기본이기 때문에 그것이 번거롭다고 하더라도 형식상 꼭 갖춰야 할 예의요, 예절이다. 물론 식당 등 행사가 행해지는 장소에 따라서 국민의례를 생략하는 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에도 사회자는 반드시 그 사유를 아뢰어 행여 소홀함이 없었다는 사실을 참석자들에게 주지시켜야 한다.

간혹 국제행사를 거행하는데 우리나라 태극기를 거꾸로 게양하는 실수를 범하는 수가 있다. 외국 측에서 게양할 때에는 태극의 기본색깔을 구분하지 못하여 그랬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이 주관하면서도 그런 실수를 범하는 수가 생긴다. 심지어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장에 거꾸로 태극기를 걸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우리의 정신자세가 얼마나 해이해졌는지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문제는 극히 작은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으나 정신자세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우리 스스로 다짐해야할 사항 아니겠는가. 필자는 지난 주 전북 군산에 있는 모 신문사 창간 8주년 기념식에서 축사할 기회를 가졌다. 강당을 가득 메운 축하객들과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축하화환으로 화려하게 식장은 장식되었다. 늘씬한 도우미들이 익숙한 솜씨로 안내를 맡아 행사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정해진 순서에 조금도 차질 없이 멋지게 진행되었지만 “아차”하는 순간에 국민의례는 끝을 맺고 막 바로 기념사에 돌입하는 것이었다. `묵념’순서는 아예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언론기관이 체계를 갖춘 기념식을 하면서 사회자로 하여금 도상 리허설이라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못했던 것일까. 사회자의 말솜씨는 청산유수 같았지만 막상 앞 이빨이 빠진 형국이 되고 말았다.

드디어 축사를 할 차례가 왔다. 나는 축사에서나마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할 일종의 사명감을 가졌다. 3·1만세운동이 벌어지고 잇달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된 지 금년이 90년째다. 당시 왜적들의 손에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자들이 죽음을 당했던가. 광복군 투쟁에 의해서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선열들을 벌써 다 잊었단 말인가.

한국전쟁에서 숨진 호국영령들을 누가 있어 위로하며 독재정권과 싸우다 죽은 억울한 민주영령들을 정녕 불러줄 사람이 없단 말인가. 나는 혼자서 비분강개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가 축사를 하기 전에 참석자 모두를 일으켜 세운 다음 정식으로 `순국선열, 호국영령, 민주열사에 대한 묵념’을 할 것을 제의했다. 어느 누가 반대하겠는가. 반주를 담당한 사람은 재빨리 묵념의 예에 맞는 장중한 주악을 연주한다.

이 날의 기념식은 묵념 소동을 겪으며 오히려 더 큰 반향을 일으켰던 모양이다. 리셉션 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여러 사람이 나에게 악수를 청하며 늦게나마 묵념 순서를 갖추게 해줘 고맙다는 표현을 해줬을 때 “역시 우리 민족은 선열을 잊지 않고 있구나.”하는 감격을 맛볼 수 있었다. 겉으로는 자신의 일에 바빠서 조상을 잊기도 하겠지만 막상 일깨워주면 즉시 반응하는 민족으로서의 저력이 있다.

이것이 전쟁을 치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일약 세계 10위권을 맴도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요, IMF를 극복한 끈질긴 생명력 아니겠는가. 조상을 섬기고, 선열을 기리는 후손에게는 신의 축복이 항상 기다리고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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