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묻지 않은 비밀의 정원…순수를 탐하다
때 묻지 않은 비밀의 정원…순수를 탐하다
  • 황인옥
  • 승인 2017.05.0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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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김상열 기획초대전
12~27일 서울 갤러리 세인
초현실적인 풍경 통해
이상향 향한 본능 표현
세련된 정제미 특징
김상열
김상열의 전시가 서울 강남구 청담동 갤러리 세인에서 12일부터 27일까지 열린다.

8년 전, 김상열은 고민에 빠졌다. 형식의 변화가 절실했고, 주제도 ‘현상’에서 ‘본질’로 확장하고 싶었다. 그러는 사이 필연과 우연이 교차하는 세 종류의 기억이 스쳐갔다. 두 번의 기억은 유년기와 관계됐고, 한 기억은 몇 년 전의 일이다.

유년기 김상열의 집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주민들의 식수로 이용하던 저수지 옆이었다. 봄날 이른 아침 눈을 뜨면 피어오르는 자욱한 안개 무덤으로 저수지 주변이 장관을 이루고는 했다. 주변의 아름드리 벚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벚꽃 잎을 물안개가 감싸 안으면 어린 마음에도 서러움이 밀려왔다.

명절날의 추억은 더 아스라했다. 사촌·형제들과 한 방에 누워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는데 문득 눈을 돌리면 창호지 사이로 달빛을 받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일러이는 풍경이 들어오곤 했다. 어린 김상열의 감성에 푸른 물이 뚝뚝 떨어졌다.

청도 작업실에서의 사건은 유년의 기억과 달리 분석적이다. 8년 전의 일이다. 한참 작업에 열중하다 고개를 돌렸는데 음료수 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날따라 거슬려 휴지통에 내던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 캔이 사라진 자리에 여전히 캔 형상이 남아 있었다. “캔이 있던 자리는 먼지가 없고, 그 주변은 먼지로 쌓여있었다. 그걸 보면서 보이는 존재와 가려진 존재에 대한 영감이 밀려왔다.”

변화를 모색하자 어린 시절 벚꽃 잎을 유희하던 물안개와 창호지 사이로 비친 달빛, 그리고 먼지 속에서 발견한 음료수 캔의 형상 등의 화석처럼 강렬한 세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조합되고 해체됐다. 그런 과정 속에서 ‘자연’이 화두처럼 머리를 스쳤다. “어린 시절 자연은 내면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8년 전 새로운 작업에 목말라 있을 때 저 밑바닥에서 자연에 대한 향수가 올라왔다.”

변화는 작업내용과 형식,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됐다. 회화의 확장은 그 첫 번째 변화였다. 모티브는 먼지 속에서 발견한 음료수 캔의 형상. 이 기억을 ‘비움’과 ‘채움’으로 치환해냈다. 먼저 캔버스 표면에 수차례의 밑 작업을 한 후 블랙물감으로 전체를 채색하고 어둠에서 빛을 찾아가 듯 자연의 이미지를 남기고 주변을 지워나가기를 반복해 갔다. 반복된 비워내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상이 드러났다.

“명료한 형상들은 흰 여백과 함께 몽환적인 자연의 형상을 드러내고 마치 안개 속 풍경 또는 눈 속에 희미하게 올라오는 마법 같은 풍경을 만든다. 완성하고 보니 어린 시절 안개 속과 창호지 사이에 비친 자연 풍경과 일치했다.”

작품의 제목은 ‘비밀정원(Secret garden)’. 주제는 자연의 본성이 작동하는 세상, ‘이상향’이다. 이 ‘비밀정원’에는 이상향을 찾아가는 수많은 이야기와 시간의 궤적이 중첩된다. “그 속에는 길도, 산도, 물도 있다. 초현실적인 정원은 내 내면이자 우주 공간이자, 이상향이다.”

김상열의 비밀정원은 질문을 부르는 그림? 이는 맞는 말이다. 경계를 가볍게 넘나드는 그의 그림을 본 관람객들이 그림인지, 사진인지,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그리고 판화인지를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 옳은 답이 될 수 있다”는 말로 관람객과 소통을 시작한다. 그러면서 “재료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표현한 서양화”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정제미가 넘실대는 작품의 분위기와 달리 작업 과정은 역동적이다. 마치 퍼포먼스처럼 빠른 시간에 작품이 완성된다. 대작의 경우도 길어도 일주일이면 작업이 종료된다. “작품을 완성하는 시간보다 오히려 마음을 가다듬기 위한 사색 등의 준비과정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 그가 최근에 또 다른 변화를 시도했다. ‘비밀정원-꿈(Secret garden-dream)’ 연작이다. 작품에는 꽃잎 같기도 자국 같기도 한 작은 형상들이 꿈결처럼 화폭을 채우고 있다. 불어서 드러내는 방식은 이전과 동일하지만, 형상적인 측면에서 자연 풍경이라는 거시적 풍경에서 작은 꽃잎을 닮은 미시적 형상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형상이 간결해지면서 추상성이 강화되고, 주제는 밀도를 더했다. “정제미에 단순미를 더했다.”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도전성, 끝없는 탐구심으로 계속해서 진화해가며 다음 전시가 기다려지는 김상열의 기획초대전은 12일부터 27일까지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갤러리 세인에서. (02-3474-7290)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 김상열은 영남대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리로이얼(LeRoyer) 갤러리와 뉴욕의 아트레드(Artered) 갤러리에서 상설전을 가졌다. 2014년부터는 세계12개국에 지점을 두고 있는 오페라갤러리, 2015년엔 이탈리아 밀라노의 가구회사인 컴퍼니 SHS 디자인사와의 콜라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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