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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대구논단

안철수와 함께 본 택시운전사

기사전송 2017-08-17, 21: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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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열
전북대 초빙교수
요즘 새로 나온 영화로 화제인 군함도와 택시운전사가 제법 경쟁이 되는 것 같더니 택시가 군함을 제쳤다는 문화계뉴스다. 아마도 군함은 일제의 강압으로 이뤄진 70여 년 전 징용탄광부의 처절한 삶의 몸부림을 표현했지만 벌써 오래된 얘기고, 택시는 37년 전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 주제인데다 아직도 그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못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그러리라고 생각된다. 5·18민주화운동은 신군부의 쿠데타에 맞선 광주중심의 항쟁이었지만 그 영향력은 전국에 미쳤으며 서울 부산 대구 전주 청주 대전 울산 등등 각지에서도 대학생들의 조직적인 저항과 투신이 잇따르는 큰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전북대학교 이세종열사는 교내에서 경찰에 쫓기던 중 학생회관 4층에서 떨어져 5.18 최초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민주화를 위해서 총상을 입고 죽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 외에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처절한 실상을 잘 알면서도 북한 특수군 600명이 내려와 국군에 저항한 것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불량한 극우분자도 있지만 이번에 새로 상영되는 택시운전사 영화는 독일기자의 활약상을 그대로 전한 것이다.

힌츠페터 기자는 서울에서 택시로 광주까지 달려가 철저하게 통제된 광주일대에 잠입한다. 그는 카메라로 광주시민의 저항과 군인들의 잔인한 탄압상을 모두 촬영한다. 피투성이로 번진 병원과 부상자 그리고 사망자의 모습은 그가 아니었다면 생생한 기록으로 남을 수 없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 택시운전사의 도움이 컸다. 경황이 없는 급박한 현장에서도 힌츠페터는 운전사의 연락처를 받았지만 ‘김사복’이라는 이름과 전화는 가명이어서 끝내 찾지 못한다.

힌츠페터는 2004년도에 한국을 위한 기자상을 받으며 택시운전사를 못내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았으며 힌츠페터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2016년에 독일에서 세상을 떴다. 서울의 택시운전사는 이러한 정황을 모르고 벌써 세상을 뜬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택시영화를 한 번 보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시간을 내지 못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안철수대표 측에서 5·18부상자회 김후식회장에게 연락을 해왔다. 8월 9일 밤에 부상자 3인과 함께 영화 관람을 함께 하자는 제안이다. 서울에 사는 전대열 설용남 이군순 셋이서 영등포 신세계백화점 CGV에서 안철수와 만났다. 초면이다. 그 자리에는 따로 광주에서 올라온 당시 전남매일 라경택기자가 동석했으며 대학생 7~8명도 동참했다. 때마침 국민의당 대표경선을 앞두고 출마를 선언한 안철수를 뒤쫓는 언론사들이 대거 몰려와 치열한 취재경쟁을 벌였다. 우리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카메라 후레쉬를 받으며 짧은 대화시간을 가졌다.

안철수는 이 날의 모임에 대한 인사를 통하여 “5·18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오늘 이 자리는 당시 광주에서 항쟁에 참여했던 부상자들과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을 감행하여 생생한 기록을 남긴 기자 그리고 선배들이 이룩해 놓은 민주화운동의 역정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알고 싶은 젊은이들이 함께한 자리여서 매우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라경택은 “5·18민주화운동의 생생한 기록을 영화로 보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짧게 인사했고 부상자를 대표한 나는 초청해준 안철수대표에게 사의를 표한 후 “오늘 5·18을 기록한 영화를 보면서 참혹했던 현장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역사 속에서 또다시 되풀이될 수 있는 군사독재의 만행이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굳은 약속을 해야만 한다”고 힘줘 말했다.

영화는 광주 현장을 실감나게 표현하면서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끔 속도감을 높인 것이 돋보였다. 특히 어느 때부터인지 이 나라의 정치여론은 택시 기사들의 입에서 나온다는 말처럼 저항운동에서도 앞장서는 모습을 부각시켰다. 극중 표현이지만 외신기자를 쫓는 군인들과 이를 방해하는 택시운전사들의 사투는 신나는 질주를 통하여 블록보스터의 진면목을 과시하기도 했다. 나는 이 나라의 격동기에 실제로 택시운전을 하며 자신을 달랬던 몇 사람이 생각났다. 노태우 비자금을 폭로하여 일약 스타 반열에 오른 박계동은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서울에서 1년간 택시운전을 했다. 국회의원이 택시를 모니까 너도나도 한 번 타보려는 사람이 많았다. 박계동은 투옥도 마다하지 않고 투쟁했지만 민주화 이후 보수 진보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지금은 한국택시협동조합을 만들어 쿱택시를 운영하여 기사들의 복지증진에 전력 중이다.

5·16이후 파리로 건너간 홍세화는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였다”는 책을 출판하고 귀국하여 각종 매체를 통한 소중한 칼럼을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분은 크게 이름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4·19혁명 당시 전주경찰서장으로 미국유학까지 했던 분이다. 김원용. 이미 고인이 되었다. 키가 크고 장대한 신체의 소유자이며 전주고등학교 이철승의 동기생이다. 그는 4·19혁명 후 경찰직을 사퇴하고 서울에 올라와 택시운전을 했다. 유명인사의 택시운전 원조격이다. 그는 내 선배지만 집안끼리도 잘 아는 처지였는데 데모현장에서 마주쳤을 때 “대열아, 몸조심하라”고 이르고는 딴 곳으로 갔다. 이분들이 택시운전을 한 것은 모두 먹고 살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격동기에 나타나는 택시운전은 또 언제 보게 될지 먼 하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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