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고무신
하얀 고무신
  • 승인 2017.09.2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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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농사꾼이다. 외출을 할 때면 시렁 높은 곳에 고이 모셔둔 먼지 묻은 구두를 꺼내 신는다. 구두솔로 쓱쓱 문지르면 까만 제 색깔을 드러낸다. 아버지는 구두를 신고 발을 탁탁 구르고 “갔다오마” 한 말씀 남기고 가뿐히 집을 나선다. 뒷모습이 참 멋지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흰 고무신을 신는다. 앞쪽에 약간 각이 들어간 고무신은 금방 사왔을 때는 구두만큼이나 신사적이다. 그러나 모내기를 하기위해 논에 물을 대고 써래질을 할 때는 흙탕물이 흥건하고 흙덩이도 덕지덕지 묻는다. 신사하고는 거리가 먼 농사꾼의 신발이다. 고무신은 농사꾼의 신발로는 제격이다. 운동화나 구두를 신고 농사를 짓는다고 상상해보라. 흙이 묻은 것을 씻고 털고 말리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가? 그런 신발을 신으려면 몇 켤레는 있어야 맨발로 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무신은 농사꾼에게 딱이다. 흙탕물과 흙덩이가 묻은 고무신을 일이 끝나고 흐르는 도랑물에 담가 손으로 쓱쓱 문지르면 금방 깨끗해지는 것이다. 신속하고 실용적이다. 그래서 농사꾼인 아버지는 고무신을 즐겨 신은 것 같다.

아버지는 까만 고무신은 좋아하지 않았다. 흰 고무신보다 더 질겨 오래 신을 수 있지만 선비같은 흰 고무신을 더 좋아했다.

비단 우리아버지 뿐만은 아니다. 우리마을 남자어른들은 거의 대개 흰 고무신을 신는다. 일이 끝난 밤에 우리집 아랫방 문앞에는 아버지신발과 닮은 흰 고무신이 빽빽하다. 일찍 온 사람들은 가지런하고,늦게 온 사람들은 여기 한 짝, 저기 한 짝 일때도 있다. 급하게 들어온 사람은 한 짝은 바닥에, 한 짝은 남의 신발 위에 턱 걸쳐 있기도 하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점도 있다. 금방 산 것은 선명한 흰색, 조금 된 것은 보통 흰 색, 오래된 것은 낡아서 검은 색이 섞인 흰 색이다.

아버지들은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대체로 구별하지만 그래도 바뀌는 걸 염려하며 신발위에 표시를 해둔다. 우리아버지는 한자‘孝’자를 까만 볼펜으로 써 놓는다. 아버지 가운데 함자이다. 다른 분들도 아버지처럼 이름자 중에 한 자를 써 놓기도 하고 기호같은 것을 표기해 두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집에 누가 왔는지 신발만 보고도 어른들은 아신다. 그리고 우리아버지가 다른 집에 가 계실 때도 엄마가 오시라고 해 가 보면 우리아버지나 있나 없나를 신발만 보고도 확인 할 수 있다. ‘

신발에 표기를 해두어도 가끔은 신발을 바꿔 신고 오시기도 하고 가시기도 한다. 밤이니 분간을 잘 못하신 것이다. 그러면 아침에 신발 주인을 찾아 뛰어 다닌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이다. 신발 주인을 아니 헤매는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남의 한 짝을 들고가 내 반쪽을 찾아 돌아올 때까진 애가 타게 기다리다 반쪽을 보면 반가워하신다.

결혼후 친정나들이를 하면 아버지 고무신만 아랫방 문앞에 동그마니 놓여 있었다. ‘아버지-“하고 부르고 문을 열면 아버지는 어두운 방에 불도 안 켜고 텔레비젼을 보시고 계셨다. 아버지 절친이신 동네”오빠“(내가 촌수가 높아 그 분이 오빠뻘이라 그렇게 부르라고 하셔 내키진 않지만 그렇게 자주 불렀다.) 께서는 아버지더러 동네회관에 놀러 오라고 하신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람들 많은 데 가시기 싫으신 듯 잘 안 가신다. 몸도 약하고 기력도 약해지신 탓이다. 난 내가 집에 왔을 때 아버지가 계시니까 좋아 굳이 그런 말을 하진 않는다. 술잔을 주고 받는 장인과 사위를 보고 난 아버지의 흰 고무신이 까매진 것 같아 수돗가로 가 솔에 비누를 묻혀 빡빡 문지른다.

고무신은 비누거품을 씻어내자 새하얀 고무신이 되었다. 물기가 빠지게 벽에 새워두니 아버지는 “그래도 딸이 낫네, 고무신도 빨아주고. 며느리는 한 번도 안 빨아주는데..”하며 좋아하신다.

‘부모에게 효도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처럼 아버지는 내가 효도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지금은 친정엘 가도 아버지의 흰 고무신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큰 나무같은 엄마가 계시지만 늘상 마음 한 켠이 허전해짐을 어쩔 수 없다.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이 너무나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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