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죽음’이란 개념을 많이 접하게 된다. 내 나이가 들며 자연스럽게 주변에 돌아가시는 분들의 소식을 듣게 되고, 학교에서 근무하며 많은 부고 쪽지를 받는다. 죽음학을 연구하는 교수님에 대한 글을 읽고 칼럼을 쓰기도 했다. 최근 독서 모임에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함께 나누었다.
쇼펜하우어는 ‘자살’에 대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종교나 죽음을 원하는 자살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삶의 고통을 없애려는 점에서 같다. 멋진 삶을 살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자살을 하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희망을 보여 주는 점에서 삶에 대한 긍정이다….”라고 말했다.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할머님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신랑과 결혼 후 1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뵌 분이었다.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내가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났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장례식장에 갔다. “왕할머니는 이 세상에 왔다가 하늘로 ‘돌아’가셨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열흘 정도 뒤, 우리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 역시 노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지 않고 편안히 가셨다. 30년 넘게 뵈어온 할머니인데도 눈물이 별로 안 났다.
어느 인디언 영화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마음의 조각을 나눠 가지는 거라고 말했다. 내가 그 조각을 통해 그 사람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대한 슬픔도 조금 줄어들 거 같다.
할머니와 할머님께서 요양병원에 계시는 몇 년 동안, 그 분들의 마지막은 당신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시고 본인의 삶을 영위할 땐 그 이상의 의미가 있겠지만,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고 나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본인의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어지는 순간 ‘부모’라는 존재는 (당신의 기분이나 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어떤 ‘상징적인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고생하지 않고 노환으로 편안히 가셔서 더할 나위 없다. 그곳에선 건강한 두 다리로 좋아하시는 마실도 많이 다니셔요. 이번 생, 고생 많으셨습니다.
할머니 두 분을 보내드리며 든 생각은, 대부분의 순간에 후회 없이, 촘촘하게 나이 들고 싶다는 것이다. 매 순간을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채우고 싶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자주 기억한다면 그렇게 힘든 것도, 그렇게 화가 날 것도 없지 않을까. 대부분의 순간에 나의 죽음을 잊고 살기에, 작은 것에 화가 나고 크게 힘들어하게 된다.
자주 죽음을 기억하자. 사소한 것에 더 자주 행복해하며 살기 위해.
쇼펜하우어는 ‘자살’에 대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종교나 죽음을 원하는 자살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삶의 고통을 없애려는 점에서 같다. 멋진 삶을 살 용기가 없는 사람이 자살을 하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희망을 보여 주는 점에서 삶에 대한 긍정이다….”라고 말했다.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책을 읽으며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할머님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신랑과 결혼 후 10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을 뵌 분이었다. 정도 많고 눈물도 많은 내가 이상하게 눈물이 안 났다.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장례식장에 갔다. “왕할머니는 이 세상에 왔다가 하늘로 ‘돌아’가셨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열흘 정도 뒤, 우리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할머니 역시 노환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시지 않고 편안히 가셨다. 30년 넘게 뵈어온 할머니인데도 눈물이 별로 안 났다.
어느 인디언 영화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마음의 조각을 나눠 가지는 거라고 말했다. 내가 그 조각을 통해 그 사람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에 대한 슬픔도 조금 줄어들 거 같다.
할머니와 할머님께서 요양병원에 계시는 몇 년 동안, 그 분들의 마지막은 당신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시고 본인의 삶을 영위할 땐 그 이상의 의미가 있겠지만,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고 나서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본인의 생활을 지속하기 힘들어지는 순간 ‘부모’라는 존재는 (당신의 기분이나 건강 상태와 관계없이) 어떤 ‘상징적인 존재’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고생하지 않고 노환으로 편안히 가셔서 더할 나위 없다. 그곳에선 건강한 두 다리로 좋아하시는 마실도 많이 다니셔요. 이번 생, 고생 많으셨습니다.
할머니 두 분을 보내드리며 든 생각은, 대부분의 순간에 후회 없이, 촘촘하게 나이 들고 싶다는 것이다. 매 순간을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선택으로 채우고 싶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자주 기억한다면 그렇게 힘든 것도, 그렇게 화가 날 것도 없지 않을까. 대부분의 순간에 나의 죽음을 잊고 살기에, 작은 것에 화가 나고 크게 힘들어하게 된다.
자주 죽음을 기억하자. 사소한 것에 더 자주 행복해하며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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