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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

<소설 '1950년 6월'> 6.선생님 시집가던 날(2)

기사전송 2009-08-24, 09:4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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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내 어깨를 안고 몸을 흔들며, “광막한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러 왔느냐…” 하고 어려운 노래를 불렀고 나는 선생님의 젖가슴에 얼굴이 묻혀 숨이 멎는듯한 무아경으로 빠져 들었다.



그날 저녁에는 사또 고배상 같은 밥상을 독상으로 받았고 선생님의 어머니도 연신 많이 먹으라며 이것 저것 반찬 그릇을 내 앞으로 당겨 주었다.



지난 늦봄 영순이 생일상 이후 처음 받아보는 진수성찬에 나는 석 달 열흘을 굶은 놈처럼 정신없이 먹어댔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머슴들은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나뭇가지와 짚으로 동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인형을 만들었고 선생님은 인형에게 입힐 옷을 만들었으며 나는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그림도

그리다가 식곤증으로 꾸벅꾸벅졸자 선생님이 이부자리를 펴주며먼저 자라고 했다.



오줌이 좀 마렵긴 했으나 밤에 남의 집 변소에 가기가 무서워 참다가그대로 골아 떨어졌다내가 서

양공주 차림을 한 선생님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며 어느 결에 어은동(동네이름) 물더미(절벽아래 깊은 물이있는 곳)까지 오니 덤 밑에 있는 가파른 바위틈 에하얀 도라지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나는 청초하고 예쁜 도라지 꽃이 선생님을 너무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으며 선생님도 창백한 얼굴로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예쁘기도 해라, 호진아네가 이 병든 선생님을 그리도 사랑한다니 정말고맙구나, 도라지 꽃의 꽃말은`영원한 사랑’이란다, 저 도라지 꽃을 꺾어오면 네 사랑을 받아주마.”

라고 했다.



나는 서슴없이, “선생님요, 지는요 참말로 선생님을 영원히 사랑할낍니더.” 하고 처음으로 가슴에 묻어 두었던 마음을 선생님께 고백하고는 다람쥐처럼 가볍게 내려가 꽃을 꺾어 올라오자 선생님이 내 손을 잡아 당겨주는 순간 우리는 시퍼런 강물에 함께 떨어졌다.



깜짝 놀라 눈을 뜨니 사방은 캄캄하고 내 손은 엄마 젖을 쥐고 있었고 바지가 질퍽하게 젖어 있었다.



차츰 어둠에 눈이 익자 나는 그만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다.



옆에 누어있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엄마가 아니고 선생님이었다.



(세상에 이 일을 우야꼬…) 양단이불에 오줌을 싼 것만 해도 예삿일이 아닌데 선생님 젖까지 만졌으니 이번에는 퇴학이 아니라 사형을 면치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전혀 대책이 서지 않아 훌쩍훌쩍 울기만 했다.



선생님은 나를 안아 누이며 “괜찮아, 더 자거라.” 했고 나는 찔금 거리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사학년 봄이 되자 우리선생님이 서울의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간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몸이 그래가지고 시집을 가마 뭐 하노, 알라나 올케(제대로) 노캤나?” 하는 누나의 말에, “그래도 처녀귀신은 면해야지, 그라고 오선생이 미국에서 좋은 약을 구해줘서 몇 달 먹고 나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 카더라.” 하고 엄마가 대꾸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요 시집가마 안됩니더, 지는 우야라고예…)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울었

다.



엄마는 혀를 끌끌 차며,“세상에 별 꼬라지 다보겠네, 이마빡에 피도 안 마른 기 뭐 안다고 저카노.” 하면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꼬박 이틀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지가 축 늘

어지자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누나가 나를 들쳐 업고 엄마와 함께 한의원에 다녀오자 선생님이 또과자봉지를 들고 찾아 왔다.

엄마한테서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은 나를 안고 한참 동안이나 서럽게 울었고 나도 누나도, 엄마도 덩달아 울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담배만 연방 피워 물었다.



“호진아, 선생님은 내일 서울로 떠난단다, 얼른일어나 이제부터는 선생님은 잊어버리고 미국유학도 다녀오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다음에 우리 다시 만나자, 그리고 미스터 오는 미국정부에서도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내가 보증할 수있으니 만사를 제쳐놓고 같이 가서 열심히 공부하여 꼭 성공해서 돌아와야 한다.”하면서 울음을 삼키며 유학경비에 보태 쓰라고 두툼한 돈봉투를 억지로 엄마 손에 쥐어 주었다.



“호진아, 이 세상에 부자는 몇 안되고 대부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란다, 가난이란 부끄러워할 일도 기 죽을 일도 아니고 그저 조금 불편할 뿐이란다, 가난이란 것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장래를 망치게 된단다, 그러니 그런 문제는 어른들 몫으로 돌리고 너는 미국유학 준비에만 전념하여라, 그리고 어머니께도 당부 드립니다만 저는 서울에서 항상 미스터 오와 전화로 연락이 가능하니 어려운 일은 저한테 이야기 해주시면 제가 힘껏 돕겠습니다, 어린 것이 공부 외에 다른 걱정을 안 하도록 특별히 신경 써 주시기 바랍니다” “예, 철도 들기전에 가난부터 먼저 겪었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선생님요, 서울로 가시마 안됩니더” 하고 나는 선생님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기차화통소리 보다 더 크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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