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가장 따뜻한 공간…휴머니즘·인생 녹여냈죠”
“집은 가장 따뜻한 공간…휴머니즘·인생 녹여냈죠”
  • 황인옥
  • 승인 2016.12.20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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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연작 전시·‘집 이야기’ 발간한 화가 서영옥
화가·비평가·교수 ‘1인3역’
7년여간 틈틈히 30점 완성
상생공존하는 이상적 마을
그림 바탕에 손글씨 더해
정서적 조형요소로 활용
“한 화폭서 그림·글 어울려
서양화로 푼 문인화인 셈”
서영옥1
‘집’ 연작을 통해 인간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담아내는 서영옥. 그녀의 전시가 20일부터 25일까지 봉산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사진=전영호기자

#. 어느 늦가을. 대청마루에 젊은 주부와 그녀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창호지를 바르느라 부산하다. 겨우내 매서운 바람을 막아줄 창호지에 정성을 다해 풀을 바르고 방문에 붙이고 나면 젊은 어머니는 말려둔 코스모스 꽃잎과 단풍잎을 창호지 위에 붙인다. 가을바람에 창호지 풀이 바싹 말라 쭈글쭈글하던 창호지가 팽팽하게 펴지면 마술을 보는 듯 신기했다. 어린 서영옥에게 창호지를 바르는 일은 일이라기보다 놀이에 가까웠다. 이 삽화는 화가 서영옥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서정’을 설명하는 에피소드다.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살았는데 제 어린 시절은 따뜻했어요.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자식 사랑만큼은 넘치셨던 부모님 밑에서 굴곡 없이 살았죠. 나고 자란 시골 또한 제 영적인 정서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그때의 서정이 지금까지 예술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 풋풋했던 대학 1학년 때로 기억된다. 매일 이른 시간인 아침 7시면 등교했던 서영옥의 눈에 어느 날 불 켜진 연구실이 들어왔다. 하루 이틀은 누군가 불을 끄지 않고 갔으리라 짐작했지만, 매일 이른 시간에 불이 켜져 있는 연구실을 지켜보면서 특유의 호기심이 올라왔다. 하루는 짝눈을 하고 문틈으로 실내를 탐색하는데 머리가 허연 노(老) 화백이 눈에 들어왔다. 서영옥이 당차게도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 노 화백과 통성명을 했다. 극재 정점식(1917~2009·전 계명대 교수) 화백과의 첫 대면이었다.

연구실에 틈만 나면 들러 이것저것 물었던 서영옥에게 정 화백이 책 4권을 내밀었다. 정 화백이 쓴 책들이었다. 책에는 유창한 문장과 잘 정돈된 지성이 넘실댔다. 화가를 꿈꾸던 서영옥에게 정 화백이 건넨 책은 일대 사건이었다. ‘화가도 책을 쓴다’라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이었고, 서영옥을 비평가로 살게 하는 첫 단초였다.

“당시 선생님의 작품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글까지 잘 쓰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화가도 글을 쓸 수 있다는 새로운 발견이었죠. 일부러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작정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제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정점식 선생님의 영향 때문인 것 같아요.”

#. 고등학교 3학년인 서영옥이 늦은 밤 책상에 앉아 장문의 편지를 쓰고 있다. 미대 진학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한 절박함에서 마주 앉은 편지지였다. 공부도 곧잘 했던 터라 그녀의 아버지가 딸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시골에서 수재 소리 듣던 딸이 대학 교수가 되기를 바랐던 것.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영옥은 긴 시간을 들여 박사과정을 마치고 결국 대학 강단에 섰다.

“아버지가 미대 진학을 반대하셔서 A4용지 16장 분량의 장문의 편지를 썼죠. 그렇게 반대하시던 아버지께서 제 편지를 보시고 제가 얼마나 미술을 하고 싶어 하는지를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다고 해요. 그러고 미대 진학을 허락하셨죠. 비록 아버지가 제가 대학에 들어가고 돌아가셨지만 제가 학사와 석사를 거쳐 10년 동안이나 박사과정을 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도 컸던 것 같아요.”

서영옥의 이름 앞에는 무려 3종류의 직함이 붙는다. 화가와 비평가, 교수가 그것이다. 그녀는 어린시절 시골에서 성장하며 경험했던 따뜻한 정서를 그림과 글로 담아내고 있고 대학 강단에서 자신의 경험을 후배들과 나누고 있다.

최근 서영옥이 20일부터 전시를 시작하고 책을 출간했다. 전시와 책 출간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것. 이는 화가와 비평가를 겸하는 그녀의 이력을 감안할 때 당연지사다. 책을 통해 그림을 보다 내밀하게 설명하고, 그림으로 책을 압축적 시각화로 드러내며 그 둘이 하나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7년 전부터 시작한 ‘집’을 주제로 한 작품 30여점을 건다.

“그림과 책요? 제게는 분리되는 독립된 과정이 아니라 서로 보완·상생하는 관계에요. 지난 20여 년 동안 간간이 조용하게 전시를 해 왔지만 이번 전시는 좀 다릅니다. 그간의 저의 작업에 방점을 찍고 가는 전시라고 할까요. 책도 그런 취지와 동일선상에 있죠.”

화가 서영옥은 비평가와 대학 강사를 겸하며 그림도 그린다. 혹자는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것을 권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어느 것 하나도 놓칠 수 없었다. 특히나 그림은 단 한 순간도 의식과 손에서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녀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 선택한 운명이 그림이었다”며 “이론과 실기를 겸하는 사람이 가지는 조금은 다른 시선과 태도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3가지를 놓지 않고 지켜왔다”고 했다.

서영옥의 그림은 변화를 거듭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학부 초기에는 여느 대학생처럼 풍경화 등의 사실화를 주로 그렸다.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작업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시기는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당시 그녀의 의식을 건드린 것이 ‘한지’와 ‘천연염료’였다. 이 재료들은 어린시절의 기억과 관계된다.

“저만의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형제들이 함께 모여서 창호지를 바르던 정서가 떠올랐어요. 외할아버지도 한지에 글씨를 쓰시곤 하셨어요. ‘그래 이게 내 것이다’하며 무릎을 쳤죠. 한지야말로 가장 ‘우리’ 답고 ‘나’ 다운 것이었죠.”

그녀의 ‘집’은 엄밀히 말하면 ‘마을’이다. 뚝뚝 떨어져 있는 집이 아닌 여러개의 집들을 점조직처럼 연결해 마치 하나의 집처럼 따스하게 구성했다. 여기에는 화려한 바탕에 알록달록하게 색채의 향연을 펼치는 마을도 있고, 아크릴을 혼합한 색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마을도 있다. 그녀의 마을은 존재들이 상생하며 공존하는 이상향에 가깝다.

“2009년 방천시장 프로젝트에 참가하면서 제가 기록을 담당하게 됐어요. 당시 6개월간 방천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할머니들을 뵈었죠. 그분들의 삶의 무게를 지켜보면서 ‘집’이라는 개념이 거처이기도 하면서 안식처였고, 누구에게는 궁궐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우주였어요. 집 속에 담겨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마치 ‘엄마의 품’ 같았고 ‘우주의 공간’처럼 따뜻했어요.”

그녀의 ‘집’ 연작은 다분히 구조적이다. 대학에서 이론 수업을 가르치는 이론가의 본성이 시각적으로 드러난 결과다. 여기에 시골에서 나서 자연의 너른 품에서 유영하던 어린 시절의 따뜻한 감성은 지배적인 정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집’과 ‘사람’에 대한 동일시는 휴머니즘으로의 확장을 이끈다. 그녀는 그림의 바탕을 일기로 채우거나 집의 일부에 깨알 같은 손글씨를 더해 글을 조형요소로 활용한다. 이때 조형요소는 단순한 시각화를 너머 정서적인 바탕으로 연결된다.

“문인화에는 시, 서, 화가 어우러지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사람의 체취를 느낍니다. 제 집도 그와 다르지 않아요. 노란 불이 켜진 창이 이어진 집들을 통해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연상하지요. 제 그림은 서양화로 푼 문인화라고 할 수 있어요. 집 속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림으로 풀리기도 하고 글로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이 둘이 하나의 화폭에서 어우러지기도 합니다.”

‘집’ 연작은 휴머니즘의 결정체다. 서영옥은 작품 속 휴머니즘을 설명하기에 앞서 “자신은 인덕이 많은 사람”이라고 서두를 꺼냈다. 그려면서 “살면서 만나는 고마운 사람들의 마음들이 휴머니즘으로 작품에 환경이 고스란히 집적됐다”고 강조했다. 휴머니즘은 작품과 비평가 그리고 교수 등 서로 다른 분야를 하나로 묶는 중심 주제이자 서영옥 삶의 일부다.

‘휴머니즘’이 발현된 것은 그림이 먼저였다. 서영옥의 그림은 그녀의 어머니와 남편의 응원이 더해진 합작이다. 남편이 황토 흙을 구해주고 어머니는 집에 올릴 꼴라주 천을 직접 바느질한다. 딸이 훌륭한 화가가 되기를 기원하는 어머니의 마음과 행복한 화가가 되기를 응원하는 남편의 지원이 작품 속에 오롯이 담겼다.

책 출간 또한 지인들의 무한애정이 그대로 담겼다. 서화가인 문강 류재학 선생이 캘리로 서제를 쓰고 작품 평까지 기꺼이 해줬고, 출판사 해조음의 이철순 사장도 적극적인 도움을 줬다.

“제 산출물들에는 가족들의 저에 대한 사랑과 주위 분들의 정성어린 애정들이 가득 담겨있어요. 휴머니즘적인 환경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죠.”

1인 3역을 해야 했던 그녀의 삶은 치열했다. 10여년에 가까운 박사과정은 그야말로 사투였다. 계명대학교에 박사과정이 생기고 초창기라 학위심사가 까다로웠다. 결혼 후 출산과 겹쳐서 더욱 힘들었지만 결국 그녀는 학위를 통과했다. 글쓰기는 박사논문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병행하게 됐다. 가까운 화가들의 평론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평론글 의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평론글을 모아 책 ‘서영옥이 만난 작가, 작품 읽어 주기’를 엮을 만큼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한 책 ‘서영옥의 집 이야기’에는 10여 년 동안 써온 일기 중 일부와 생활 속에서 느낀 단상 등 80여 편이 그녀의 그림과 함께 실렸다. “책은 학교와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생활에 대한 소박한 이야기이지만 같은 길을 가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해요.” 전시는 21일부터 25일까지 봉산문화회관 2전시실에서.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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