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떡
쑥떡
  • 승인 2016.04.26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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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자연요리연구가
피나 싶더니 그새 진다. 여기저기 꽃 사태로 난리더니 벚꽃 진자리에 라일락 향 짙다. 초록은 나날이 도톰해지고 보리는 벌써 두 마디나 자랐다. 작은 배나무에 올해 처음 흰 꽃이 폈고 도랑물에 피라미 식구 깨 송이처럼 늘었다. 자두 꽃 진자리에 씨방이 도톰하게 부풀어 올랐고 해가 길어진 봄날인데도 어찌나 빨리 저무는지 지난 겨울해라도 꿔다 쓰고 싶은 날이다. 누가 봄날을 눈 깜짝할 새라고 했던가? 그 말이 맞다. 어영부영 둥둥거리다 보면 금방 초하의 볕이 뜨거워지는데 오월 단오 전에 꼭 해먹어야 하는 떡이 있다. 밥 혹은 쑥떡으로 기억되는 묵직한 맛. 맛을 가늠하기보다는 기억을 꺼내 먹는 맛, 밥알 쑥떡이다. 큰 준비 없이도 언제나 가능한 이 떡은 무꽃 피고 그 위로 배추나비 두엇 날아다닐 때 밥 해먹듯이 가볍게 해먹을 수 있다. 예전에 방앗간은 멀고 밥 대신 불현듯 떡이 먹고 싶은 날, 그런 날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후다닥 해 먹는 떡이다.

하얗게 솜털이 핀 애쑥 보다 제법 초록이 짙어지고 이파리가 여러 장 겹친 좀 자란 쑥을 배불리 뜯어와 끓는 물에 데친다. 초록이 선명해지도록 소금 한꼬집 넣고 몰캉하게 삶아 찬물에 헹궈 꼭 짜둔다. 찹쌀은 하루 전에 불려놨다가 밥물보다 조금 더 자작하게 물을 잡고 밥을 한다. 우글우글 끓다가 밥솥 뚜껑이 하품하면 잠시 불을 낮추고 뜸을 들인다. 밥알이 말랑해져 속속들이 물러질 때까지 푹 재운 후 알맞게 뜸이 들면 뜨거울 때 꺼내 절구에 찧는다. 절구 옆에 소금물을 놓고 떡에 살살 발라가며 찧으면 더 차지고 맛있어진다.

떡에 단맛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간이다. 모든 음식은 간이 맞아야 제 맛이 난다. 짭짤한 간위에 단맛이 더해져야 비로소 단맛이 제 빛을 발한다. 밥 알갱이가 반은 뭉개지고 반은 밥알 그대로 남도록 거칠고 무례하게 찧는다. 찰떡마냥 꽈리가 일도록 치면 밥알 쑥떡 본연의 맛을 해치니 좀 엉성하게 찧어 밥알이 성글게 보일 때 볶은 콩가루에 살짝 굴린다. 모양은 한 입 거리보다 둥글넓적하게 빚어 손에 들고 베어 먹는 것이 제 맛이다. 매끈한 요즘 떡과 달리 밥알이 씹히는 거친 떡이지만 먹어보면 뚝배기보다 장맛이다. 한 입 베어 물면 고소함과 쑥 향이 입 안 가득 봄을 선사한다.

예전에는 아무리 많이 장만해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고 요즘은 아무리 많이 장만해도 먹을 사람이 없다. 사시사철 밥뿐이던 어린 시절, 종일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고 기다리다 지쳐 부엌문을 열면 한줄기 햇빛 속에서 놀라 달아나던 먼지들 사이에 쑥떡 소쿠리가 얌전히 있었다. 분명 떡인데 먹고 나면 밥 먹은 듯 뱃속이 든든한 그런 음식이었다. 콩고물에 굴린 쑥떡 하나만 가져도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한 하루였다.

그렇게 보면 행복의 가치 기준은 내가 느끼는 “기분 좋음”인데 지극히 주관적이다. 다시 말해 스스로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이러니 남과 나 사이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고 비교해서 느끼는 행복이야말로 남의 행복을 내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아닐까? 자신의 행불행이 남에 의해 결정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을까? 유엔이 선정한 우리나라 행복지수는 58위다.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했음에도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는 재미가 없다” 라며 우울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덴마크가 행복지수 1위인 이유는 “삶의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기 때문이고 살다 힘들어 벼랑 끝에 서도 누가 보살펴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지금 이 땅에도 존재하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정치나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먹어도 허기진다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마음 밭이 허해졌을 때는 골을 메워야 한다. 흙을 북돋우고 고랑에 거름을 내며 자신을 친절하게 다독여야 한다. 비어있는 마음 밭을 메우는 데는 찹쌀만 한 것이 또 있을까? 찹쌀의 끈기가 몸속에서도 힘의 원천이 되는지 기운 떨어지는 봄날에는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쑥떡이 으뜸이다. 괜스레 휑하니 주저앉고 싶을 때,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이고 뒤로 물러서고 싶을 때 이럴 때 한껏 삐뚤어진 마음자리를 되돌리는 묘약은 기억 속 음식이다. 잊힌 추억을 더듬어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면 근심 걱정은 저만치 물러나고 다시 세상 밖에 우뚝 설 힘이 생긴다. 봄꽃 지고 초록이 짙어 오는 날, 밥알 쑥떡 한입에 하늘에 계신 엄마도 만나고, 힘도 얻고, 엉겁결에 봄도 가고, 이러다 후다닥 또 여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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