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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달구벌아침

매화 향기와 애탕국

기사전송 2018-03-19, 2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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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수필가
나이를 먹으면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서로 주고받는 눈빛처럼, 감으로 알게 되는 게 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운 적이 없어도 ‘툭하면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줄 알게 된다. 배운 지식보다 삶의 순간, 순간에 충실하게 오래 머물다보면 또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앓다가 보면 그냥 저절로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봄날, 주택인 우리 집 화단에 매화가 핀다는 사실은 기적이다. 가지마다 수액이 오르고 활짝 핀 꽃 속으로 떼로 날아들어 몸을 비벼대는 벌떼들을 보면 기적은 비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곤 한다. 다만 이런 기적적인 일들이 어찌 때와 장소를 알고 찾아오는지 신기할 뿐이다.

휴일 아침 창문을 열어젖히자 와락 매화향이 밀고 들어온다. 방충망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안방 가득 쌓인다. 딸아이 품안에 잠자던 달이와 산이 그리고 몽이가 어찌 알아 챈 건지 차례대로 뛰어나온다. 그리고 창틀에 쪼그려 앉아 코를 킁킁 거리며 향기를 맛보고 입맛을 다신다. 비몽사몽 눈을 가늘게 뜨고 정신없이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달이와 산이 몽이가 자다 말고 뛰쳐나가던데 이게 무슨 일이고. 세상에나, 이건 또 무슨 향기지. 참 신기하네. 꽃향기를 맡고 저리 뛰어 나간거란 말이가. 근데 우째 알았지?”

창 밖에는 매화 반, 벌 반이다. 꽃이 벌인지 벌이 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자다 말고 달려 나온 달이와 산이 그리고 몽이는 이미 꽃향기에 취해 봄날 꽃밭에 앉은 취객처럼, 창틀에 앉아 꾸벅꾸벅 나머지 잠을 청하고 있다. 매화향이 집안 가득 향기를 채우는 동안 “오늘은 햇쑥으로 애탕국을 끓여, 달래 무침을 곁들인 밥상이나 한 번 차려 볼까나” 했더니 딸이 반색하면서 애탕국을 어떻게 끓이는지 알려달라며 조른다.

그럼 너도 시집가려면 이것도 알아야하니 한번 해보라고 맡겼더니 지혜 없고 지식뿐인 기계가 가르쳐 준 레시피를 검색해 본 딸아이가 겸연쩍게 묻는다. “엄마 너무 어렵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데” 라는 물음에 나는 봄날의 향기처럼 대답했다.

“먼저 쑥은 시든 잎과 검불을 떼어내고 바득바득 씻어 쑥물을 빼내야 해. 소금 넣은 물에 살푼 데친 후 밑간한 다진 쇠고기에 데친 쑥을 썰어서 넣고 잘 어울리게 동글동글 완자를 빚어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 옷을 입혀줘야 한데이. 그다음 멸치와 다시마 우린 육수에 넣고 간은 간간하게, 소금 한 꼬집과 조선간장으로 간하고 국물의 수위는 눈으로 대충 알아서. 맛내기는 혀가 입안에서 느끼는 감정에 알맞게 담백하게 조절하면 된데이. 입맛이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걸 잊지 말고 일단 심심하게 끓여야 해. 싱거우면 간을 좀 더 하면 되지만 짠 건 어찌할 도리가 없거든.”

순간 딸의 눈빛이 흔들린다. ‘파는 몇 센티 길이로 잘라야 하는지, 듬성듬성 굵게 썰어야 하는지 아님 잘게 채로 썰어야 하는지, 소금은 또 몇 그램을 더 넣어야 하는지. 물은 한 컵 반이면 될는지’ 인터넷이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에서 정보를 검색하는 것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딸아이로서는 대략난감한 일이라는 것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혼잣말처럼 레시피를 중얼거렸다.

“거의 대부분은 가족의 입맛에 맞추어 음식을 하지만 가끔, 나에게 상을 주고 싶은 날이나 살아생전 애탕국을 즐겨 드시던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봄날이면, 오직 나만의 입맛에 맞출 때도 있었지. 그러니 오늘은 너에게 전권을 주마. 딸아 어렵지 않은 일이야.” 딸은 부처의 말을 알아들었던 가섭처럼 알 듯 말 듯 한 염화미소를 보인다. 그런 딸의 뒤에서 나는 다시 한마디 더 던졌다. “중요한 건 언제나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란다.” 뜬금없는 마지막 말에 딸은 당황 했을 것이다. 봄이 오면 입맛을 다시게 되는 애탕이 생각나듯, 매화 향기가 보낸 봄의 신호를 알아듣고 창가로 달려 오르던 달이, 산이, 몽이. 그리고 봄날의 입맛을 찾은 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햇쑥으로 초록빛 애탕국을 끓이고 있다. 자신만의 봄을 보글보글 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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