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CEO 탐방] 김종률 ㈜창성씨앤엘 대표 “더 좋은 제품 만들어 전국 도로 환하게 밝히고 싶어”
[휴먼 CEO 탐방] 김종률 ㈜창성씨앤엘 대표 “더 좋은 제품 만들어 전국 도로 환하게 밝히고 싶어”
  • 강은주
  • 승인 2022.07.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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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D 실외등 전문 생산 기업
가로등·보안등 판매 전국 1위
디자인~생산~판매 ‘원스톱 라인’
매년 매출액 8% R&D 비용 투자
여러 기관서 우수성 인정 받아
전국을 밤낮 없이 다니며 영업
10여년 지나 조명 업계서 두각
중국서 사업 중 세상 보는 눈 떠
주물 사업 시작할 수 있는 용기
김종률
김종률 ㈜창성씨앤앨 대표. 더 좋은 제품으로 전국 도로를 환화게 밝히는 것이 꿈이라는 김 대표가 생산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시 북구 검단동에 자리잡은 ㈜창성씨앤엘(대표 김종률·60)은 LED 실외등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다. 1999년 주조 공장인 창성금속을 설립, 2003년부터 각종 등기구를 개발하며 LED 조명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대표적 제품인 메쉬망 기술을 적용한 LED 조명등 개발로 지난해 조달청 가로등·보안등 판매 전국 1위를 차지했다.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내 실외등 생산 선두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창성씨앤엘의 김종률 대표를 만났다. 경제현장의 기업인답지 않은 순수한 모습의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얼굴은 그 사람의 인생을 담고 있다고 했던가. “사업은 용기”라고 말하는 스마일맨의 주름 속에 녹아있는 삶의 역정을 살펴본다.

- 회사 입구에 들어서니 제품을 실어 나르는 수송차들로 분주하다. 전국을 제패한 기업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수도권도 아닌 지역기업이 전국 1위의 위상을 차지한 원동력은 무엇인가.

△ 비결은 단순하다. 좋은 제품이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다. 창성씨앤엘의 대표적 제품인 메쉬망 기술을 적용한 LED 조명등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자신있는 제품이다. 회사의 자부심이자 효자 상품이다. 우리 회사의 또 다른 경쟁력은 제품 디자인에서 설계, 주조, 가공, 생산, 판매까지 원스톱 라인(ONE STOP LINE)의 완성형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등기구 생산업체는 외주에 의존하지만 우리는 금형, 제작, 알루미늄 부품 주조, 가공, 테스트 등 핵심 공정을 자체적으로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고객의 요청사항을 신속 정확하게 피드백하여 문제점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강점을 갖는다. 특히 2015년에 설립된 기업부설 연구소에 매년 매출액의 8%를 LED 조명 R&D(연구개발) 비용으로 투자해 신제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연구소는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지속해서 성과를 내고 있다. 연구소는 회사의 심장부이자 자부심이다.

- 연구소에서 공들인 결과물인 메쉬망 제품에는 어떤 기술력이 집약되어 있는가.

△ LED 모듈은 가로등 수명과 직결된다. 효율적 방열이 핵심이다. 일반적 방식은 통풍구 디자인을 통해 방열 효율을 높이는데, 우리 제품은 특수섬유인 모노필라멘트사로 제작된 메쉬망(방충망)을 부착해서 미세날벌레를 포함한 이물질이 통풍구에 유입되는 것을 억제한다. 통풍구에 벌레와 먼지가 쌓이면 LED 모듈을 덮어 방열 기능이 떨어지고 제품을 부식시켜 수명이 단축된다. 방충, 방진 기술은 10도 이상의 방열 효과를 낸다. 메쉬망은 지름 0.5㎜ 크기로 통풍은 원활하되 미세물질의 유입을 막을 수 있다. 탈부착이 가능하고 친환경적이며 녹슬지 않아 유지관리가 쉽다. 이러한 장점이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 지자체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이유이다. 메쉬망이 적용된 LED 조명등 기구는 성능인증, KS 인증, 녹색기술 인증, 우수제품 지정, 고효율에너지 기자재인증, 우수단체, 표준제품 인증, 우수 연구개발 혁신제품 등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창성씨앤앨
(주)창성씨앤엘의 작업라인 모습. 창성씨앤엘은 지속적인 연구개발을 통해 LED 가로등 보안등 분야에서 국내 선두 기업의 위상을 지켜가고 있다.

-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가 경기 침체에 접어들고 있다. 창성의 사업적 대응과 계획은 무엇인가.

△ 다행히도 우리 회사는 코로나19로 인한 매출 타격은 없었다. 그동안 미리 개발했던 LED 관련 방열 기술 및 각종 인증서를 통해 관공서와 민간기업으로부터 꾸준한 수요을 창출했다. 오히려 매출액이 7~10% 증가했다. 감사한 일이다. 올해는 위드코로나 경제로 회귀점(Point of Turning Back)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했다. 기존 정부예산이 각종 필요한 곳에 재배정될 것으로 예견되어, 제품 판매량 증가에 대비해서 생산 설비 증대 및 연구 개발비 증가를 계획하고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러시아 유가 폭등, 미국 통화당국의 긴축 기조 등 세계 경제가 퍼펙트스톰(총체적 복합위기)이다. 사업가에게 좋은 기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리스크가 없으면 성공도 어렵다.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국내에 머물러 있기보다 더 큰 시장을 찾아서 해외로 진출할 계획이다.

- 지방에서 사업을 한다는 것이 마라톤에서 출발선이 뒤에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쉬운 길이 아닌데, 이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 지금 사업과 연관성이 없어서 아이러니하게 들리겠지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패션디자인 사업이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옷 입고 멋 내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키가 컸더라면 패션모델이 되었을 것이다(하하). 기성복 시장이 커지면서 개인 패션업의 성장 한계를 느꼈다. 친구가 “주물 사업을 같이해 보자”고 제안해 동업을 했다. 그런데 친구가 1년도 안 돼 그만둬 버렸다. “이대로 사업을 접어야 하나”하고 고민하다가 “기왕 발 담근 거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겁이 없던 시절이었다. 우선 능력이 있는 기술자를 고용하고, 나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영업을 했다. 불철주야 열심히 하다 보니 자연스레 거래처도 생기고 신용이 쌓였다. 회사도 함께 성장했다. 10여년이 지나니 가로등 조명업계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고생도 고생이지만 운이 좋았고 인복이 많았다.

- 열정맨, 스마일맨으로 노력한 당연한 결과아닌가. 김 대표에게 사업가 DNA가 느껴진다. 개인적 성장 과정에 남다른 답이 있는가.

△ 사업을 하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나는 1963년 김천 구성면에서 태어났다. 하늘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두메산골이었다.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하셨다. 나는 4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장남은 한 집안의 대들보였기에 귀한 대접을 받았다. 남들 꽁보리밥 먹을 때 나는 하얀 쌀밥 먹으며 자랐다. 아버지께서 “상업은 힘들다”며 “공직자가 되어라”라고 하셨다. 나는 공부가 싫었다. 학창 시절부터 내 옷은 직접 다림질해서 입고 깔끔하게 멋을 냈다. 20대에 디자인, 재단, 봉제 등 패션디자인을 배웠고 양복 정장 업을 시작했다.

IMF 사태로 30대에 인생의 고비를 맞았다. 우연한 기회에 중국으로 여행을 갔다. 광활한 대륙과 수많은 인구는 나에게 도전과 희망의 설렘을 주었다. 이곳이라면 무슨 제품이든 수천만 개를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생겼다. ‘하자’고 결심하고 점포를 계약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초스피드로 이뤄졌다. 경상도 말로 “됐나, 됐다”였다. 사업은 용기이며 선택이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나에게는 아버지의 피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 북경에서 건축 자재 도소매업을 시작했다. 조선족 13명을 고용해서 1년간 운영했다. 인천항, 부산항에서 중국 천진항으로 부지런히 물건을 실어 날았다. 물건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잠깐 다녀올 요량으로 한국에 왔다. 당시 아이들이 10살 정도 되었는데 집사람이 “이렇게는 못 살겠다”라면서 “중국 갈 거면 이혼하자”고 우겨댔다. 사생결단의 분위기였다. 무엇보다 가족이 우선이었기에 결국 중국 사업을 접었다. 다시 인생의 전환점에 섰다. 그래도 중국에서의 1년은 세상 보는 눈을 크게 띄우는 계기가 됐다. 더 이상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었다.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과감하게 주물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 앞으로 하고싶은 희망 사항이 있다면.

△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굴곡도 있었지만 비교적 순항 중이다. 크게 바닥에 떨어져 본 적도 없다. 창업 이후 23년이 지난 지금, 다른 지역에 갈 때마다 우리 제품을 보면 감회가 남다르다. 뿌듯하고 보람을 느낀다. 책임감도 뒤따른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까’라는 생각뿐이다. ‘사주 좋은 사람이 운 좋은 사람을 못 이긴다’는 말이 있다. 웃는 얼굴이 복을 부른다는 생각으로 늘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매일 웃으니 진짜로 웃을 일이 생긴다. 바람이 있다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전국 도로를 환하게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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