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조율의 시간
[달구벌아침] 조율의 시간
  • 승인 2023.04.09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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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봄비 그친 후 재바른 걸음으로 사월의 아침이 숨 가쁘게 지나가고 있다. 떨어진 꽃들이 지천에 가득하다. 뒤뜰이나 골목, 앞마당 뒷마당 할 것 없이 낭자하다. 무표정의 흙이나 시멘트 바닥이 무지갯빛으로 색을 입힌다. 매화, 벚꽃, 라일락, 모란 등등, 피는가 싶더니 이내 지고 있다.

새벽부터 부산하다. 모닝콜처럼 누군가 톡의 물꼬를 트니 지저귀는 새소리 여기서도 저기서도 지지배배 소란하다. 창을 사이에 두고 밖과 안 사이사이 행간마다 쓸쓸함과 불안이 빼곡하게 들어찬다. 창문을 연다. 모란이 향기를 앞세우고 달려와 코끝에 매달린다. 봐 달라는 신호 같다.

'향기를 따라가면 꽃을 만나고 벌을 따라가면 꿀을 얻는 법'이라 했던가. 피는 꽃이나 지고 있는 꽃 할 것 없이 화색이 돈다. 제아무리 날이 흐려도 마음마저 그림자가 드리우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낙화한다. 비우고 비움으로써 질 수 있었다. 봄 속에서, 꿈을 향한 그들만의 영역 안에서.

옥상에 오른다. 낚싯대 드리우듯 눈길을 멀리 화단 아래로 드리운다. 바닥을 지나 계단 몇 개 디디고 올랐을 뿐인데 주변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꽃과 나무, 날아가는 새들 하나하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치 신이라도 된 듯 그들의 표정을 세심히 살핀다. 사람이든 꽃이든 그 누구도 두 번 갈 수 없는 길, 그 위에 서서 어디로 가야할지 때론 얕게 때로는 깊이 생각에 잠긴다. 길이 길을 불러 모아 오래 머물고 싶은 길을 보여준다.

봄이라고는 하지만 꽃구경 한 번 제대로 할 새 없이 이미 지고 있더라는 그녀의 문자가 날아든다. '사는 게 뭐가 그리도 바쁜지 쓸쓸하고 외롭다'며 지는 봄이 아쉬운 누군가의 댓글이 쏟아지는 사월이다. '져 주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말에 머물고 앉아 한참 동안 골똘히 들여다본다.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지만 경험치가 늘어가고 세월의 더께가 두터워질수록 새해가 가고 오듯 서서히 내 맘에 녹아드는 사월이 지고 있다.

오래전, '말하는 대로'에서 조승연 작가가 펜싱해본 경험을 근거로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 해 강한 인상을 남긴 적이 있다. 펜싱 용어 '투셰'를 가리켜 펜싱이라는 스포츠는 채점이 어렵다며 그 이유는 '삐' 소리가 날 때까지 누가 누굴 찔렀는지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칼이 워낙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찌른 사람조차도 '제대로 찔렀는지, 빗나가게 찔렀는지 파악하기 힘들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점수가 났는지 안 났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한다. 축구에선 득점하면 '골'을 외치듯 펜싱은 '투셰'라는 단어를 외치는데, 이는 '찔렀다'라는 뜻이 아니라 '찔렸다'라는 뜻이라며 채점할 때는 득점한 사람이 아니라 실점한 사람이 손을 들고 점수를 주는 것이 펜싱의 법도'라고 알려주었다. 칼을 맞은 사람이 신사답게 자진해서 '투셰'를 외치며 칼을 하늘 방향으로 올려 패배를 시인한다는 것이다. '투셰' 라는 말을 하는 순간, 무공이 올라간다던 말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불현듯, 꽃은 '지는 게 아니라 져 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꽃이 져 줌으로서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번, 꽃을 피워 본 것만으로도 꽃은 꽃이 아닐까. 지건 이기건 한순간도 꽃, 아니었던 적 있었을까. 져 줌으로써 꽃이 꽃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으니 더는 슬플 것도 서러울 필요가 없으리라. 기꺼이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 주는 일일 테니.

며느리가 딸 같지 않아 섭섭하고 사위가 아들 같지 않아 서운하며 남편이 남의 편만 같아 야속하다는 메시지로 전화통은 종일토록 불이 난다. 매 순간 전쟁의 연속이며 조율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기기 위해 져 주고 져 주는 척 속아주는 것이 이기는 것 아닐까.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고 속인다. 그러나 어쩌랴. 이기고 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가족 한 민족 더 나아가서는 한세상 안에서 잠시 피었다가 머물다 가는 것을.

전쟁 중에도 꽃은 피고 지고, 지는가 싶으면 다시 핀다. 씁쓸한 마음에 먼 곳에 있는 친구에게 만개한 모란꽃 사진으로 안부를 전한다. 그녀 역시 아침 댓바람부터 남편과 다투었다며 그녀의 마당에 핀 모란꽃을 찍어 보내며 화답한다. 화와 화 사이 '세상에는 딱 두 가지 파가 있는데 쪽파와 대파래'라는 우스개를 채워 넣으며 시작하는 하루, 햇살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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