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봄신령
[달구벌아침] 봄신령
  • 승인 2023.04.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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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봄만 되면 떠오르는 두 개의 영상, 매년 늙지도 않고 그들은 나타난다.

초등학생 홍희는 학교를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친구는 어디갔는지 혼자서 마을로 들어선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동그라미 같은 못이 있다. 못둑 아래로는 신작로까지 내리막길이 있고, 그 왼쪽은 야산, 오른쪽은 네모난 판자같은 논이 있다. 못둑위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못둑을 건널때는 밑으로 보이는 경치가 시원하다. 그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또한 시원하다. 산 위에서 마을로, 마을에서 신작로로 부는 바람일 수도 있지만, 시원한 봄바람은 저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고 있는 것 같다.

그 날은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짧은 단발머리였다. 그러나 원래 노란 원피스는 팔이 짧은 여름 원피스 밖에 없었다. 그리고 초등학교때는 단발이 아니고 긴 머리였다. 초등학교 6학년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커트로 잘랐고 그 전까지만 길었다. 그런데 기억속의 영상은 노란원피스에 단발머리였다.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온 몸을 휘감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기분좋게 날렸고, 얼굴을 간지럽혔다. 옷속으로 들어간 바람에 옷도 펄럭였다. 마치 붕 떠오를 것같다. 치맛자락도 이리 저리 바람따라 휩쓸려갔다 왔다를 반복했다. 춥거나 차갑지 안고, 덥거나 후덥지근하지도 않은 바람은 바로 봄바람이었다.

못은 얼음이 녹았다. 차갑기만 하던 물과 얼음도 평화로운 물빛을 뿜어냈다. 맑고 깨끗한 물이 봄바람에 잔잔히 흔들렸다. 풀도 녹색도 띠고 물속에서 생기를 찾았고, 겨울동안 얼음아래서 살아있었던 물고기가 떼를 지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봄바람을 타고 올챙이도 꼬리를 흔들고 다녔다. 둑에선 파란 잔디가 돋아나고 있었고, 잔디사이로 보라색 제비꽃도 피었다. 그 옆에는 할미꽃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못가에선 버들강아지가 강아지꼬리같은 새싹을 틔웠다. 작고 여린 것들이 태어나는 봄이었다. 멈춰있지 않고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속에서 홍희도 깡충깡출 나풀나풀 뛰듯이 걸었다. 봄 속에 있던 홍희의 정신도 봄이었다. 그들처럼 작은 아이였던 그 날이 어른이 된 후에도 봄마다 소환이 된다. 아니 현재에서 과거로 이끌려 간다.

두 번째 영상은 엄마, 아버지와 함께 밭에 있는 장면이다.

그 날은 학교를 가지 않은 날이었다. 아마 일요일일 것이다. 낮은 산이 계단식으로 밭이 되어 있었고, 가장 높은 밭에 엄마와 아버지와 홈희가 있었다. 얼어서 녹은 땅에 고랑을 만들어 까만 비닐을 까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고추를 심으려고 준비작업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봄답게 바람은 선선했고, 햇살은 따뜻했다. 겨울동안 집안에만 있던 아버지와 엄마는 일을 하는 것이 즐거운지 피곤해하는 기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봄나들이를 온 것 마냥 즐거워보였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나지 않아보였다. 젊고 생기넘치던 엄마와 아버지, 그 날은 다툼도 우울도 화도 없는 희망과 행복의 날 같았다. 빙둘러 싸인 산의 녹색나무들과 따사롭게 내리비치는 햇빛이 엄마, 아버지의 표정과 마음과 같았다. 그리고 땅은 폭신폭신했다. 가끔은 스펀지처럼 밑으로 푹 꺼지기도 했다. 물기가 있어 신발에 흙이 묻어 떨어지지 않아 맨발로 다니는 것이 편했다. 그 느낌. 잊을 수가 없다. 발다닥에 닿는 봄흙의 다정함과 생기. 완벽한 봄날의 오후였다.

봄만 되면 이 두 장면이 떠오른다. 그 곳으로 가야할 것 같고, 그 순간에 와 있는 것 같다. 지금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느낌이 드는 그 장면, 봄신령은 왜 자꾸 봄만 되면 그 날을 불러낼까? 그 날로 이끄는 걸까? 행복한 느낌을 주엇던 그 날. 그 날의 엄마와 아버지를 잊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늘 어린아이처럼 행복한 봄을 맞이하라고 하는 것일까? 봄만 되면 봄신령이 자꾸만 그 때 그 순간으로 데려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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