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보험금이 지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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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정우
  • 승인 2023.04.2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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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불도저를 탄 소녀’ 스틸컷.

아버지가 차를 훔쳐 교통사고를 내고 뇌사상태에 빠졌다. 생계수단인 중국집도 넘어가게 생겼다. 내편은 없다. 뭘 해도 안 되는 세상.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 누구도 도울 수 없는 상황, 이 세 가지가 한 번에 찾아온다면? 박이웅 감독의 ‘불도저에 탄 소녀’는 촘촘하게 얽힌 자본주의 시스템을 종횡하며 분투하는 소녀의 치기어린 소동극처럼 보인다. 그렇다, 소동극.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나도 문제없는 이야기, 어쩌면 그렇게 끝내야 모두가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우리들 내면의 자화상 말이다.

반복되는 폭력전과로 폭력교정 수강명령과 직업수강 행정명령을 받은 혜영은 불만 가득한 표정과 거친 언어와 팔에 새긴 용 문신을 무기 삼아 살아온 소녀이다. 혜영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공격성과 분노다. 또래에서나 통하던 강한 이미지는 사회적 권위와 시스템에 복무하는 평범한 얼굴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혜영의 가족은 시스템 밖 사람들이었다. 가게를 지키려는 혜영의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건 이 때문이다.

복수라는 단어조차 낭만적으로 들릴 때가 바로 폐허이고 파국이다. 가게를 부순 다음 최회장의 집을 부수리라. 갓 스물이 된 소녀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기업인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혜영은 아버지의 산소 호흡기를 떼던 밤, 동생을 이모 집에 맡기고는 초대형 페이로더를 몰고 나선다.

직업훈련소 강사는 여자가 중장비운전 배워봐야 써먹을 데가 없다며 차라리 미용기술을 배우라고 했다. 쓸모가 없긴? 회장 집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도 집을 통째로 밀어버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 질주하는 혜영의 페이로더는 무너진 신뢰와 약자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분노였다.

총상을 입고 체포되는 소동극에도 세상은 변한 게 없다. 1년 6개월 복역 끝에 가석방 된 혜영에게 걸려온 보험사 전화와 뒤이은 아버지의 사망보험금 4억 2천만 원이 입금됐다는 문자 메시지. 아버지가 죽고, 소녀가 감옥에 다녀오고, 삶이 풍비박산 나고서야, 그제야 자본주의는 실낱같은 미소를 짓는다. 이를테면 사람이 죽어나가고 총을 맞는 정도는 돼야 약자에게 눈길이라도 주는 이 세계의 우화는 스무 살 소녀에게 미용 기술대신 불도저 운전을 배우라고 말한다. 세상은 변할 맘이 없으니 가진 게 없고 물려줄 게 없다면 사망보험금이라도 남기라고 유혹한다.

반 지하 월세에 사는 취업준비생의 삶을 그린 영화 ‘성혜의 나라’에서 무슨 수를 써도 벗어나기 힘든 성혜의 가난과 좌절을 해결해준 건 가족의 사망보험금이었다. 혜영에게 날아온 보험금 입금문자가 영화적 상상력을 넘어 낯익은 풍경으로 다가오는 느낌은 당혹스럽다. 실로 일확천금과 인생 한 방을 노리는 것이 죄가 되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세상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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