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모판에서 희망이 자라다
[달구벌아침] 모판에서 희망이 자라다
  • 승인 2023.05.1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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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란 주부
5월 농촌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논과 밭이 살아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않던 겨울의 언 땅이 녹으며 사람의 손길로 달라지고 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뛰어나고 과학기술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자연을 따라 살아가는 순리는 변함이 없다. 겨울에는 아무리 부지런한 농부라도 언 땅에서 곡식을 키워내지 못하고 봄이 되어야 농사일을 시작할 수 있다.

겨울을 지낸 논에서 잡초가 자란채로 그대로인 논도 있지만, 반 이상은 갈아엎었다. 골이 생기고 땅이 촉촉해지고 흙이 부드러워져서 무엇인가를 심기에 적합한 논이 되었다. 어떤 논은 물을 대어놓았다. 마치 투명 비닐을 깔아 놓은 듯 표면이 매끈하고 빛이 난다. 잔잔한 물위로 햇빛이 비쳐서 그렇게 보인다. 물은 댄 어떤 논에서는 모판에서 모가 자라고 있다. 요즘은 거의 기계식으로 모내기를 하기 때문에 모판도 거기에 맞게 기계로 만들어져 있다. 촘촘한 구멍이 있는 체처럼 생긴 네모난 모판에 싹을 틔운 볍씨를 뿌리고 흙을 덮어 물속에서 자라도록 둔다. 빽빽하게 못난이 인형 풀?처럼 모가 가느다랗게 자란다. 그걸 이앙기로 모내기를 한다. 사람의 손길은 모판을 만들 때 가장 많이 들고, 그 이후에는 한 두 사람과 기계만 있으면 될 정도로 쉬워졌다.

아버지와 엄마가 모내기를 할 준비를 할 때에는 모든 것이 엄마, 아버지의 손과 시간과 발걸음이 필요했다. 볍씨를 물에 담가 축축하게 해서 비닐 포대기에 담는다. 아랫방 윗목에 빨간고무다라이에 넣어서 헌이불을 덮어둔다. 싹이 트도록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쿵큼한 냄새가 난다. 따뜻해진 볍씨가 눅눅해지면서 내는 냄새다. 1주일 아님 2주일이 되었을 까 며칠마다 비닐포대기를 들춰보던 아버지는 밖으로 들고 나간다. 이미 볍씨가 뿌려질 모판은 준비되어 있었다. 소에 쟁기를 걸어 논에 써래질을 해서 물을 대어 놓았다. 모판은 바둑판처럼 도드라지게 만들고, 양옆에 고랑을 내어 경계를 지었다. 삽으로 평평해지도록 등으로 쓰다듬듯이 쓸어내렸다. 1센티미터정도 하얀 싹이 난 볍씨를 뿌린다. 최대한 고르게 흩어지도록 손에 잡은 볍씨를 조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한 곳에 집중적으로 뿌려질 수 있다. 볍씨는 볍씨간의 간격이 최대한 고르게 뿌려져야 모내기를 하기에 적당한 크기로 잘 자랄 수 있다.

아버지는 매년 볍씨를 뿌린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그 날부터 몇십년간 봄이 시작될 때마다 뿌렸을 것이다. 정확히 몇세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일찍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고, 자신이 결혼을 한 이후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농사지을 할아버지가 안 계시고, 결혼하여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처와 태어날 자식이 있으니 농사가 직업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이 아니엇을 지라도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잇는 상황이 되지 못했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지 못한 아버지. 처음 볍씨를 뿌려야 했을 때 얼마나 긴장되고 떨렸을까. 아니면 늘 보아왔던 일이라 편하게, 아주 잘 할 자신이 있었을까.

아버지는 해마다 볍씨를 뿌릴수록 더욱 손에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모가 자랄수록 희망이 자랐을 것이다. 논농사로 벼를 거두어들이고, 벼를 공판장에 내다팔고 번 돈으로 다음 농사준비를 하고, 술 한잔 마음껏 걸칠 것이다. 그리고 자식들이 커 나갈수록 들어가는 학비에 충당할 것이다.

내 배 불리고, 맛난 것 먹고, 좋은 옷 입으려는 욕심보다는 자식농사를 잘 짓는 것이 더욱 중요했을 아버지, 엄마. 모판에서 모가 자라듯 자식들이 잘 자라기를 볍씨를 뿌릴 때마다 기원했을 것이다. 그 기원을 알기에 자식들도 모나지 않게 잘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아버지의 모판에서는 희망이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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