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쌈마이
[백정우의 줌인아웃]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쌈마이
  • 백정우
  • 승인 2023.08.03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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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1
영화 ‘밀수’ 스틸컷.

류승완 감독의 ‘밀수’를 보자마자 오래전 인터뷰를 찾았다. 2006년 3월 1일 ‘주먹이 운다’ 개봉에 맞춰 류승완이 지승호와 한 인터뷰다. 방대한 분량 중에 눈에 띄는 류승완의 말. “영화를 잘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 그것보다 위에 존재하는 삶의 위대함이 있다.”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한국영화계를 놀라게 했을 때 류승완은 천방지축과 패기로 무장한 B급 정신의 계승자였다. 과감하게 차용하고 베끼면서도 돌파구를 찾아 새로운 구조를 꿈꾼 할리우드키드 류승완은 액션의 쾌감과 폭력의 정조를 구분할 줄 알았다.

‘피도 눈물도 없이’와 ‘주먹이 운다’와 ‘짝패’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류승완의 영화는 쌈마이를 ‘꼭’ 품고 있었다. 여기서 꼭이란 반드시가 아닌 놓칠까 조심하며 애지중지한다는 뜻이다. 그의 삶도 영화도 쌈마이였고, 그런 수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엇갈린 운명을 사는 남자들의 자멸극은 오우삼에게서, 하늘에게서 버림받은 삼류 인생의 유혈극은 스콜세지에게서 이 둘을 합친 타란티노의 장광설까지 더해놓은 류승완의 쌈마이는 재미와 가치를 모두 챙겼다. 그리고...

‘밀수’는 1970년대 군천항이 배경이다. 영화는 어촌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고기잡이가 힘들어지자 밀수품 운반에 가담한 사람들의 욕망과 배신과 탐욕의 서사를 그린다. 텔레비전 시대에 걸맞게 당대의 히트가요가 쉼 없이 흐르는 시공간은 스크린을 촌스럽고 투박하게 장식한다. 70년대가 아니어도 된다는 얘기다. 심지어 밀수는 한국전쟁 직후에 가장 극성이었고 6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왜 굳이 70년대일까.

1970년대는 산업화 도시화 물결로 자본주의가 한국사회와 가정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는 때였고, (보다 더 중요한) 영화적으론 류승완이 푹 빠진 할리우드 B급 무비의 전성시대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니까 70년대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B급 무비의 활발한 교류가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그때 데이비드 캐러딘, 팸 그리어, 피터 폰다, 벤 가자라가 나오는 B급 무비와 홍콩 쇼브라더스 영화들은 류승완 영화인생의 시발점이자 자양분이 되었다.

힘 빼고 놀아보자고 작심한 게 분명한 ‘밀수’는 돈 앞에서 의리와 정의를 내팽개친 비루한 사내들과, 유사가족으로 연대하는 해녀들의 대조로 진행되지만, 여성영화라기보다는 걸 크러쉬가 전면에 부각된다. 남자는 모두(그들 누구도 가족이 없다) 죽거나 죽을 만큼 다치는 반면, 여성은 살아남는 엔딩은 타란티노의 ‘데쓰 프루프’와 같다. 차용과 오마주와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은 문제 되지 않는다. 그게 쌈마이의 특징이고 미덕이니까. 그럼에도 레트로 감성을 복원하며 초심으로 돌아가려했던 감독의 의도가 과녁을 빗나간 듯해 아쉽다. 아날로그라기보다는 궁색한 미장센에 가깝고, 복고에 집착해 늘어지는 러닝타임을 방치했다. 마치 컴퓨터 천재가 주판으로 계산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타란티노가 그렇듯 류승완은 이미 메이저가 되었다. B급 감성은 여전하지만 초심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류승완 특유의 스타일을 살리되 세련되게 디자인했다면 어땠을까. 최헌의 앵두로 시작해 박경희의 저 꽃 속에 찬란한 빛까지. 총동원한 그 시절 유행가로도 해결될 수 없는 어수선한 쌈마이가 ‘밀수’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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