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조선후기 국방력 강화에 힘쓴 효종의 천기와 인생행보
[류동학의 세상읽기] 조선후기 국방력 강화에 힘쓴 효종의 천기와 인생행보
  • 승인 2023.09.04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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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우크라이나-러시아 간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를 비롯한 인접국들이 국방 예산을 대폭 늘리는 가운데 한국은 폴란드와 지난해 약 17조원 규모의 무기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작년에 국내 방산 수주 잔고를 100조원대로 올리는 쾌거를 이뤘다.

방산업계는 올 하반기 폴란드와 수출 2차 실행계약 체결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K9 자주포 460문, 현대로템은 K2 전차 820대 추가 계약을 노린다. 계약 규모는 총 25조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북한은 미사일을 수시로 동해와 서해로 쏘고 있고 여기에 북한, 러시아, 중국의 연합으로 한국은 미국과 일본과의 자유유방의 안보와 외교를 강화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경험한 조선에 새로운 국방강화에 힘쓴 인물이 조선의 제 17대 국왕인 효종(1619~1659)이다, 그는 1619년 음 5월 22일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부근의 어의궁에서 인조와 인열왕후 한씨사이에서 임자년(壬子年) 임인월(壬寅月) 기해일(己亥日)생인 소현세자 다음으로 태어났다. 1626년(인조 4년) 봉림대군(鳳林大君)으로 봉해졌다. 1631년(인조 9년) 장유의 딸 장씨(인선왕후)와 혼인하였다. 그는 슬하에 1남(현종) 7녀를 두었다. 즉 인선왕후 장씨사이에 현종(1641~1674)과 숙신공주, 숙안공주, 숙명공주,숙휘공주,숙정공주,숙경공주를 두었고, 안빈 이씨 사이에 숙영옹주를 두었다. 한편 양녀로 청의 실권자인 도르곤의 계실로 간 의순공주가 있다. 그녀는 성종의 13남 익양군의 증손자 금림군의 여식이었다. 효종은 30세인 1649년 즉위하여 40세인 1659년에 붕어했다. 의학적으로 살펴보면 효종은 오랜 기간 열병과 소갈(당료증세)을 앓았고 그 전변증으로 인해 종기가 나타났고 이 종기의 치료과정에서 사망하였다.
 

 

효종의 태어난 시기는 더운 열기가 본격화되는 망종((芒種)과 하지(夏至)가 지난 음 5월경이다. 사오미(巳午未)월의 ②갑목(甲木)일간은 양력 7월 23일 경인 대서(大暑)를 분기점으로 삼아 대서 이전은 갑목을 지속성장 시키는 자연수와 같은 계수(癸水) 정인이 반드시 도우고 정화(丁火)와 경금(庚金) 편관을 차선책으로 택한다. 대서후는 계수 없어도 정화와 경금만 있어도 귀격을 이룬다.

이 사주는 ①오화(午火) 상관격에 더운 열기의 논밭인 ④미토(未土) 정재가 합세하여 조열(燥熱)함이 매우 심하다, 그러므로 더운 열기를 식히는 계수(癸水)나 임수(壬水)가 필요하나 부족하고 배우자궁인 일지에 ③진토(辰土)편재의 습토가 더운 열기를 식히고 있다, 이것이 『적천수(滴天髓)』에서 말하는 화치승룡(火熾乘龍)이다. 대운의 흐름이 해자축(亥子丑)의 수대운으로 흘러야 성공이 보장되고 명이 길어지나 아쉽게도 10년 마다 전개되는 환경적인 요소의 천운인 대운도 기사(己巳) 무진(戊辰) 정묘(丁卯) 병인(丙寅)운으로 화기와 토기가 강한 운으로 전개되어 더위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결국 40세의 젊은 나이에 붕어하고 말았다.

만약에 태어난 시가 임신시(壬申時)나 계유시(癸酉時)면 조후를 충족하여 좋다. 다만 권력의지를 상징하고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무인성향의 ⑥경금(庚金) 편관이 ②갑목(甲木)일간을 권력의 정점으로 올렸으나 ⑥경금(庚金) 편관의 성향이 질병에 노출되기 쉬운 기질이라 결국 종기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사주는 오화의 갑목으로 상관격이 기토가 투출한 정재격으로 변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주는 기세가 허약한 신약사주가 된다, 효종은 한당(漢黨)의 김육으로 하여금 충청과 전라에 대동법을 시행하고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였다. 『국조보감(國朝寶鑑)』과 『농가집성(農家集成)』을 간행했다. 효종은 조정의 배청(排淸) 분위기와 함께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여 청나라와 연결된 김자점 등의 친청파(親淸派)를 파직시켰다. 그리고 김상헌 · 김집 · 송시열 · 송준길 등 대청(對淸) 강경파인 산당(山黨)를 중용해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다. 1652년(효종 3) 이완(1602~1674) · 유혁연(1616~1680) · 원두표(1593~1664) 등의 무장을 종용해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을 본격화했다. 즉,1652년 북벌의 선봉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고 금군(禁軍)을 기병화했다. 1655년에는 모든 금군을 내삼청(內三廳)에 통합하고 1,000명으로 증액하여 왕권 강화에 노력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는 수어청을 재강화하여 서울 외곽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지방에 51명의 영장(營將)을 설치하고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保人)을 지급해 지방의 군비를 확충하였다. 1654년의 변급과 1659년의 신유의 나선정벌 이후에는 남방은 물론 북방지대에도 나선정벌을 핑계로 산성 등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적극적으로 확충했다. 효종은 평생을 북벌에 전념해 군비 확충에 몰두한 군주였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호전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재정이 부족해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오래 살았어도 중국 역사상 최고의 군주인 청의 강희제(재위 1661~1722)가 있어서 북벌은 구호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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