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청년기 이승만의 삶의 괘적
[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청년기 이승만의 삶의 괘적
  • 승인 2023.09.18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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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과 대한민국 초대부터 제3대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1875∼1965)을 기념하는 이승만기념관건립추진위가 4.19 혁명과 5.18 민주화 인사를 비롯 전직 대통령 아들 5명까지 참여해, 좌우를 뛰어넘는 화해의 역사를 써내려갈 전망이다. 한편 배우 이영애 씨는 지난 12일 재단에 5000만 원을 기부하여 이승만기념관건립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선-대한제국-일제강점기-미군정기-대한민국을 관통하는 그의 삶의 괘적에서 공과 과가 뚜렷하여 그에 대한 평가는 좌우로 크게 나뉘고 있다.

그러나 "잘못한 것만 비난하며 국민을 갈등하게 만드는 것보다 잘한 것을 칭찬하며 화합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더 평안하고 좋은 나라에서 살게 될 수 있다"고 덧붙인 배우 이영애씨의 그의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에 힘을 보태고 싶다.

이승만은 한국 근대화의 시발점인 강화도조약이 체결되기 일년전인 1875년 3월26일 새벽 한시경에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양녕대군의 16세손으로 이경선(1839∼1912)과 김해 김씨 김말란(1833∼1896)사이에 3남2녀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전 두 명의 형은 요절했다. 그러므로 그는 6대 독자이다.
그의 가계는 양녕대군-서자 정평도정 이흔-이순-이윤인-11대조 이원약-6대조 이징하로 내려왔다. 이징하가 음직으로 현령을 지낸 것을 끝으로,12세(5대조)이오-13세(고조부)이최권-14세(증조부)이황-15세(조부)이창록-16세(부)이경선까지는 벼슬길이 끊기고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그의 천기는 명리학계의 제산 박재현(1935∼2000)선생과 빅3인『명리요강』도계 박재완(1903∼1992) 선생과 『사주첩경『의 자강 이석영(1920∼1983)선생이 본 경자시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정화(丁火) 일간(日干)이 동방(東方) 목(木)의 진방(震方)인 경칩과 춘분이 지난 음 2월(卯月)에 태어나 득령하고, 년지(年支), 일지(日支) 정관(正官)이 월령을 중심으로 살인상생(殺印相生) 및 해묘의 합목(合木)에 의해 년간에 편인(偏印) 습목(濕木) 을목(乙木)이 투출되어 일간을 도우니 일간 정화(丁火)가 강한 신강사주가 되었다.
묘월의 정화는『궁통보감』에 의하면 경금(庚金) 정재로 을목을 제하고 갑목(甲木)정인(正印)으로 정화의 불꽃을 피우면 귀격이 된다고 하였다. 이 사주는 경금이 투출했으나 뿌리가 약하여 문제이고 갑목은 해수(亥水)의 지장간 무갑임(戊甲壬)에 암장되어 있다.

그의 사주는 투출편인격으로 전략적인 두뇌가 좋고 기획력과 문장력 및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발달한 종교와 외국어와 학문,방송,언론과 인연이 깊은 투출편인격의 길격이다. 분위기 파악이 강하고 시대정신의 흐름파악과 적응력과 처세술이 빠른 투출편인격은 강한 목의 인성(印星)을 조절하는 임수 정관과 재성이 용신이자 상신(相神)이 된다.

그의 천운은 6세이후부터 무인(戊寅)대운의 상관운과 정인운으로 10년간 전개된다. 그는 초년의 에너지인 년지의 해수(亥水) 역마의 영향으로 1877년 한성으로 이주하였다. 5세에 낙동서당에서 수학하고 1885년 도동서당에 입학하여 수학한다, 1887년 정해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承龍)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16세이후부터 10년간 정축(丁丑)대운의 대인관계를 넓힌다는 비견운과 능력을 발휘하고 자아를 개발하는 식신운이자 정화일간과 용신 경금(庚金)의 묘(墓)운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1890년 경인년(庚寅年) 동갑내기인 죽음박씨(박승선)와 결혼하여 무술년 1898년 6월 9일 외아들 이봉수(1898∼1906)를 가졌다. 그러나 1906년 이봉수가 요절했다. 1895년 을미년에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1896년 병신년에 서재필의 영향으로 협성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회장과 주필을 역임한다. 1898년 무술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25살 기해년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30살 병자대운 갑진년 러일전쟁 이후 특별사면령으로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여기서 월남 이상재도 만난다. 26세이후 10년간 병자(丙子)대운의 겁재운과 편관(1900~1910)운의 시기이다. 그는 1904년 11월 고종밀사자격으로 미국으로 가서 외교독립활동과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1907년 하버드대학교 석사과정을 다니고 1908년 프린스턴대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910년 7월 18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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