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
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
  • 여인호
  • 승인 2023.10.0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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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그리워한다.

시월이 되면 국화를 비롯한 가을꽃들이 핀다. 지난 9월에 본 꽃 중 기억에 남는 꽃을 생각해보면 백일홍같이 지지 않았던 여름꽃이거나 일찍 핀 쑥부쟁이, 코스모스를 생각할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9월의 대표적인 꽃은 산자락을 붉게 물들이는 꽃무릇이 아닐까 싶다. 꽃무릇이 뭐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거고 상사화가 꽃무릇 아닌가 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꽃무릇과 상사화는 다른 꽃이다. 꽃무릇과 상사화를 헷갈리게 한 것은 축제의 명칭이 한 몫을 하기도 했다. 9월 유명한 축제 중에 불갑산상사화축제가 있다.

영광군이 상사화축제라고 명명한 것은 이웃 함평군이 꽃무릇축제라는 이름을 먼저 썼기 때문이다. 꽃무릇도 상사화의 일종이니 상사화축제라고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나 불갑산상사화축제의 꽃은 엄연하게 꽃무릇이다.

우리가 정씨라고 하지만 정씨 중에는 동래, 연일, 하동, 봉화, 나주 등 여러 본관이 있는 것처럼 수선화과 상사화속에 위도, 제주상사화, 백양화, 꽃무릇 등이 있다. 같은 정씨이지만 나주 정씨는 다른 정(鄭)씨와 달리 고무래 정(丁)자를 쓴다. 나주 정(丁)씨한테 정(鄭)씨라고 하면 예법에 벗어나는 일이다. 꽃무릇은 같은 상사화 속이지만 종이 다르다. 꽃무릇은 석산종이고 그 밖의 상사화는 상사화종이다. 그래서 꽃무릇을 석산이라고도 한다. 박형준 시인이 ‘당신이 죽고 난 뒤 핏줄이 푸른 이유를 알 것 같다’라고 말한 석산이 꽃무릇이다.

시인들의 시적 표현도 상사화와 꽃무릇을 헷갈리게 했다.

“선운사 동백꽃은 너무 바빠/ 보러 가지 못하고/ 선운사 상사화는 보러 갔더니/ 사랑했던 그 여자가 앞질러 가네.”

정호승의 ‘선운사 상사화’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시인이 ‘상사화’라는 낱말 대신 ‘꽃무릇’을 썼다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달픔이 애절하게 표현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희덕 시인은 ‘꽃과 잎이 서로의 죽음을 볼 수 없어야 비로소 피어날 수 있다기에 붉디붉은 그 꽃을 아주 잊기로 했습니다.’라고 상사화와 꽃무릇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시 속의 붉디붉은 꽃은 꽃무릇이다.

두 꽃은 꽃이 필 때는 잎이 없고, 잎이 있을 때는 꽃이 피지 않는 공통점이 있지만 꽃모양이 다르다. 여인의 긴 마스카라처럼 수술이 길게 우산살처럼 나온 붉은 꽃은 꽃무릇이고 연분홍이나 연노랑색 꽃잎에 백합 모양을 한 꽃은 상사화이다. 대개 연분홍색의 상사화가 일반적이나 꽃잎이 노랑색이거나 흰색이 섞인 상사화는 피는 지역의 명칭을 따서 위도상사화, 제주상사화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상사화의 수수함이나 꽃무릇의 정열적인 꽃모양 자체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는 꽃의 특성 때문에 그 꽃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그리워하듯 끝내 만나지 못한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있다. 화려하지 않지만 수수한 한국적인 한복의 주인공 여인 유갑봉과 그녀를 그린 화가 이쾌대의 이야기이다.

‘오! 어여쁜 아가씨여 오! 나의 귀여운 천사여!’로 시작해서

‘한 떨기 장미꽃. 나는 그 옆으로 배회하는 벌나비올시다.’라는 편지를 보냈던 이쾌대는 유갑봉과 결혼을 했고 단란한 가정생활을 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는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둘은 헤어지고 만나지 못하게 되자 이쾌대는 유갑봉에게 어려울 때 작품을 팔아 써라도 자식들을 주리지 마라고 편지를 보낸다. 유갑봉은 포목상 등으로 네 자녀를 키우면서 그의 작품을 다락방에 고이 간직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해금조치가 된 후 1991년 신세계미술관에서 이쾌대전이 열렸고 2015년 유족들은 이쾌대의 모든 아카이브를 공개하였다. 공안의 고문과 가택수색에도 무사히 숨겨졌던 이쾌대의 작품이 한국 화단에 활짝 꽃피게 되었다. 이 작품 중에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대작의 군상도가 있는가 하면 2인 초상이라는 소박한 그림도 있다. 이 그림은 장미빛 한복을 입은 아내가 앞에 있고 그 뒤 그림자같이 비치는 모습이 이쾌대이다. 카드놀이를 하던 단란한 부부의 그림과 달리 어둡다. 만나지 못할 것을 예견한 것인지 시선마저 다른 방향을 쳐다보고 있다.

이쾌대 그림 속 부부의 모습은 한 편의 로맨스 영화로 만들어져도 아름다울 것 같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남여가 한 쌍의 은행나무로 환생하거나 고양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영화가 아니라 현생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장면이다. 한쪽에서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처럼 청색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이쾌대가 걸어오고 반대쪽에서는 봄바람에 치마를 나부끼며 댕기머리 봄처녀가 다가와 이쾌대에게 살포시 안길 것 같다. 이쾌대 편지의 ‘영원토록 나의 품에 고요히 안고 지내고 싶어요’ 구절처럼.

손병철<대구교육청 장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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