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 아웃] 검객과 사기꾼, ‘영화 같은’ 이야기의 위험성
[백정우의 줌인 아웃] 검객과 사기꾼, ‘영화 같은’ 이야기의 위험성
  • 백정우
  • 승인 2023.11.09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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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우칼럼우드잡1
영화 ‘우드잡’ 스틸컷.

지난 한 주 최고의 뉴스는 단연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어린 사기꾼의 이야기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재벌 3세를 사칭하고, 결혼을 빙자해 금품을 갈취했으며, 강연 등으로 알게 된 10여명에게 19억 원 넘는 사기행각을 벌인 희대의 사건. 96년생 스물일곱 청춘이 벌인 무한질주의 종착점은 어디였을까? 내가 주목한 건 일부 언론이 사용한 ‘영화 같은 사기 행각’이라는 표현이다.

영화 같다는 말에는 이중적 의미가 담긴다. 하나는 ‘거짓말처럼 기막히게’와 다른 하나는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기 힘든’이 될 것이다. 언론에서 사용한 의미는 전자였을 테지만, 사람에 따라선 이 사건을 영화처럼(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화 같은’이란 표현은 비유이면서 비유 이상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영화처럼 보는 순간, 이야기는 대중이 원하는 방향과 구미에 따라 재조합되기 일쑤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사건이나 스캔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본질과 무관하게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단어로 도배되는 건 이 때문이다. 대체로 영화 같은 이야기는 시작은 멋지지만 뒷일을 알 수 없다. 속 빈 강정일 때도 많다. 평범한 사람에게선 좀체 영화 같은 이야기를 만나기 힘들다. 집과 직장 또는 학교를 무한반복 하는 소시민이 무슨 재주로 영화 같은 삶의 주인공이 된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사건의 장본인이 구속될 즈음, 내가 본 영화 속 주인공은 울창한 숲속에서 벌목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름은 유키. 대학에 떨어지고 여자 친구와도 헤어졌다. 재수가 귀찮아서 우연히 선택한 게 산림연수생이다. 입소 이틀 만에 포기하고 도망가려다 실패하고 어찌어찌, 여차저차 하여 한 달 교육기간을 채우고는 나카무라 임업으로 배정받는다.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우드 잡’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전통을 지키는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들과 임업 노동자의 자부심이다. 유키가 번듯한 일꾼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곧 인간과 직업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야구치 시노부는 이 밋밋하고 무미건조한 시간을 알싸하게 버무린다. 임업노동자의 일상이라 봐야 삼림과 집을 오가는 게 고작이니 ‘영화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스펙터클한 미장센도 드라마틱한 서사도 없다. 대다수 사람도 이들처럼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내일을 준비한다.

나카무라 임업 사람들은 오늘만 보지 않는다. 함부로 나무를 베면 다음 세대는 수입도 일자리도 모두 잃게 될 거란 걸 그들은 안다. “농업은 내손으로 심은 채소를 내가 맛보며 보람을 느낄 수 있지만 임업은 아니야. 우리가 한 일의 결과는 죽은 다음에 나”온다는 작업반장의 말처럼, 나무 하나를 심고 가꾸는 것도 모두 조상의 전통을 잇는 동시에 미래를 위한 일이다.

한동안 두 사람을 향한 표적·가십성 기사가 쉼 없이 쏟아질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전혀 영화 같지 않은, 허구와 허상에 사로잡힌 청춘의 백일몽으로 끝난 이야기를 ‘영화 같다’는 말로 포장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들이 보낸 시간을 동경하거나 흉내 내고 싶다면 몰라도.

백정우·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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