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물길 중심으로 집성촌…생명체의 공통적 필수 요건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물길 중심으로 집성촌…생명체의 공통적 필수 요건
  • 김종현
  • 승인 2023.11.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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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신천변 성씨별 ‘배움터’를 찾아서
먹거리 많은 물 섶에 같은 성씨 모여
선인들, 서원·서당 세워 ‘미래 씨앗’
신천변에 청호·오천·봉산서원 존재
가창면에 달성서씨·단양우씨 ‘재실’
수성구에 계술재·학산재·덕산재 등
봉산서원
1799(정조23)년 손린(1566~1628)을 향배하기위해 상동에 세워진 봉산서원.

◇3W(Water, Way & Will)에 따라 집성촌이 형성

달구벌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모여들었던 곳은 신천변이다. 신라시대 삽량주의 수창군에서 고려시대 수성군으로 달구벌이 행정중심지가 됐다. 조선시대 1419(세종1)년에 대구군으로 승격, 그리고 1466(세조12)년에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로 승격되어 행정중심지가 이동됐다. 이전에는 신천을 중심으로 달구벌의 철기시대, 청동기시대, 신·구석기시대를 이끌어 왔다. 이렇게 물길(water)을 중심으로 집성촌이 형성되는 건 생명수를 요구하는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인 필수요건이었다.

다음 필수조건은 물길(water way)이었다. 물길에 이어 육로교통수단이 발달함에 따라 마차길(horse way), 기차길(rail road), 고속도로(high way) 등의 육로(陸路, land rout)가 생겨났다. 현대에는 비행기가 발명되고부터 하늘길(sky way)이란 항공로가 개척됐다. 이보다 가장 먼저 앞서야 하는 것이 ‘살고자 하는 의지(will to be)’였다. 의지(will)를 다지기 위해 종교적 교단, 교회를 세웠으나 근세에 와서는 학교를 세웠다. 한반도에 선인들은 문중서당, 문중재실 혹은 문중서원을 세워 집성촌의 의지와 미래 씨앗을 뿌린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원주민들이 커피콩을 심을 때 반드시 2~3개씩 파종을 한다. 그 이유는 1개씩 씨앗을 넣으면 30% 미만 발아를 하나, 2 ~3개씩 뿌리면 90% 이상 싹이 튼다.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도 땅에 떨어진 순간부터 경쟁하기에 식물도 군락을 이루며, 동물 역시 경쟁을 통해 성장·진화한다. 물고기의 떼지음(schooling), 새들의 무리지음(flocking), 양들의 떼거리(herding), 심지어 메뚜기 떼 구름(clouding)들도 수천만에서 억 마리씩 무리로 비행이동한다. 사람들도 자연현상에 따라 먹거리가 풍부한 물 섶에 같은 성씨들이 모여서 살았다.

이렇게 바로 금호 혹은 신천 섶에 집성촌(集姓村, same-surname village)을 형성했다. 사람이 배움터를 마련한 최초는 종교적 모임 혹은 장소인 사찰, 신전(oracle), 교회, 교단(brotherhood or sisterhood) 등에서 시작됐기에 으뜸가는 배움을 가르침(祖宗敎學, 宗敎)이라고 했다. 서양의 최초 대학들은 종교 신학 연구를 위해 만들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즉 유교문화에 따라 다른 모양새인 사묘(祠廟), 재실(齋室), 문중서당(書院)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했다. 우리나라의 문중재실이나 문중서원의 특징은 전방에 강학당을 후방엔 종묘를 설립하는 전강후묘(前講後廟) 배치방법이다. 서양 중세기 도제시설의 전상후창(前商後廠) 배치방법으로 워크 삽(workshop)이라는 용어가 생겨났다.

신천 팔조령 원류에서 출발하면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엔 1789(정조13)년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을 배향하는 녹동서원, 고려 927년 동수대전에서 전사한 전이갑(全以甲)과 전의갑(全義甲) 형제를 모시는 가창면 행정리 한천서원(寒泉書院)은 1847(헌종13)년간에 건립됐다. 1798(정조22)년에 서균형(徐鈞衡, 생년미상~1391)을 향배하는 옥계서원(玉溪書院)이 있었다. 오늘날 수성구에 산재된 신천변 서원으로는 1694(숙종20)년에 황금동 청호서원(淸湖書院), 1744(영조20)년 파동에 양희지(楊熙止, 1439~1504)를 모시는 오천서원(梧川書院), 1799(정조23)년 손린(1566~1628)을 향배하는 상동 봉산서원(鳳山書院)이 있었다. 1820년 최흥원(崔興遠)을 향사하는 동천서당(東川書堂)이 건립됐다가 훼철 뒤, 현지(동구 옻골)로 이건했다가 2017년에 철거됐다. 1926년 황금동 첨모재(瞻慕齋)에서 남은(南誾) 서섭(徐涉)과 서감원(徐坎元, 서침의 증손)을 모시는 덕산서원(德山書堂)이 건립됐다.

이어 문중재실을 살펴보면 가창면에는 옥천전씨(沃川全氏) 염수재(念修齋), 달성서씨(達城徐氏) 재실 및 단양우씨(丹陽禹氏) 재실이 있다. 신천변 수성구에 집중돼 있어, 창건연도별로 살펴보면 1600년대 장주한(蔣柱漢, 1605~1669)를 향배하는 계술재(繼述齋), 1700년 양달화(楊達和, 1694~1756)를 모시는 학산재(鶴山齋), 1740년 장자원(蔣自元, 김종직과 교류) 덕산재(德山齋), 1766년 노암(蘆庵) 정동범(鄭東範, 1710~1793) 모운당(暮雲堂), 1826년 하시찬(夏時贊, 1750~1828) 독무재(獨茂齋), 1900년 전경창(全慶昌, 1532~1585)) 무동재(武洞齋), 1900년 진씨문중(秦氏門中) 야수정, 1912년 두사충(杜師忠) 모명재(慕明齋), 1913년 양달화(楊達和, 1694~1756) 영모재(永慕齋), 1920년 순흥안씨문중 삼강정사(三剛精舍)가 있다. 1928년 단지주혈(斷指注血) 효자 모재(慕齋) 배석봉과 공천(孔川) 배영은 모친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고자 황금주공아파트 인근 성산배씨(星山裵氏) 영사재(永思齋), 1934년 박해(朴咳) 솔일재(率一齋), 1934년 이화옥 첨모재(瞻慕齋), 1937년 김수남 덕암재(德巖齋), 1938년 채선수(蔡先修, 1568~1633) 성산재(成山齋), 1955년 김상집(金尙集, 1723~졸년미상) 명모재(明慕齋), 1979년 전시헌 보본재(報本齋), 1996년 아산장씨문중(牙山蔣氏門中) 연호재(蓮湖齋) 등이 건립됐다.

◇서침(徐沈)나무에서 노블레스오블리제(nobless oblige)를

달성공원 가운데 서침나무(徐沈樹)라는 학자수(scholar tree) 한 그루가 있다. 이에 얽힌 이야기는 “1419(세종원)년 대구군 관아 자리를 물색하는 데 달성서씨 종손이었던 구계(龜溪) 서침 선생이 쾌히 승낙하자, 그 은공에 후상하고자 했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꼭 보답하겠다면 그 대신에 빈곤한 백성의 환곡(還上耗穀)에 5되씩 경감을 청원하자. 세종은 역지(驛址, 옛 역터, 오늘날 구 남산병원)와 연신지(蓮信池) 및 신지(新池)를 하사하고, 서침선생의 백성을 궁휼히 여기는 마음씨에 관료로 불차탁용(不次擢用)하였다” 이런 사실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달성공원에 회화나무를 심어 선공후사의 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이에 대해서 조선왕조실록(世宗實錄)을 찾아보니 세종원(1419)년에 대구현에서 대구군(大丘郡)으로 승격했으며, 그해 9월 28일에 지진이 일어났다. 또한 세종실록에서 서침(徐沈)에 대한 기록은 7번이나 나오는데, 서침나무의 일화와 유사한 건 세종8년 12월 24일 연산도호부사 서침(延山都護府使徐沈) 등과 세종이 수재(水災)와 한재(旱災)에 관해 말한 대담내용이 있다.
 

 
글·그림=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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