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563년, 동구 지묘동에 대구 첫 ‘사액서원’ 들어서다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1563년, 동구 지묘동에 대구 첫 ‘사액서원’ 들어서다
  • 김종현
  • 승인 2023.11.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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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금호변 집성촌의 배움터를 찾아서
1693년 백안동에 ‘백원서원’
효자였던 전귀당 서시립 제향
1868년 훼철됐다 다시 복원
동산서원
옻골 출신 백불당(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 ~ 1786)을 제향하는 동천서원으로 1820년 수성구 만촌동에 처음 건립됐던 동산서원. 그림 이대영

◇동명이인 서침

구계선생(龜溪先生)에 대한 세종실록을 검색하면, 세종8년 12월 24일자에서 시작해 세종19년 4월 19일까지 7회나 나오고 있으며, 마지막 기록은 “사헌부에서 서침(徐沈)을 처벌해주시길 세종국왕에게 계청하고 윤허를 기다렸으나 거절했다.” 그 내용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서침(徐沈)이 첫봄 월록(月祿, 오늘날 월급)을 받지 않고,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나갔는데, 의정부에선 고령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에 적당하지 않으니 파직시키라는 계청(啓請)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백성을 위해 일하겠다는데 어떤 죄도 되지 않는다고 윤허하지 않았다.

세종실록에선 서침으로 동명이인(同名二人) 서침이란 현사(賢士)의 기록이 나오기에 혼동할 우려가 많다. 전후를 비교해야 함에도 지역신문에선 뒤섞어 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호칭에 있어서도 구계(龜溪) 이중립(李中立, 1533~1571)과 혼동을 초래 할 수 있게 ‘구계집(龜溪集)’과 ‘구계선생문집(龜溪先生文集)’을 소개하고 있어 몇 번이고 대조가 필요하다.

구암서원(龜巖書院)은 달성서씨 문중서원으로, 1665(현종6)년 구계(龜溪) 서침(徐沈, 1365~몰년미상)의 덕행을 기리고자 현 대구초등학교 서남쪽 언덕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숭현사(崇賢祠)를 세우고 제향하다가, 1718(숙종44)년 동산동 229(信明女中高等學校 아래)번지로 이전하고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1420~ 1488), 약봉(藥峯) 서성(1558~ 1631) 및 함재(涵齋) 서해(1537~ 1559) 선생을 추가 배향해 오다가 1778년(정조2)에 서원수계(書院受繼) 받았다. 1788년 경례재(經禮齋), 누학재를 세워 서원 모습을 구비해 구암서원(龜巖書院)으로,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24년 다시 세워, 1943년 숭현사(崇賢祠)와 강당(講堂)을 중수했다. 1996년 동산동의 도시화로 인해 산격동 연암공원 내로 이전했다.

일전에 옛 구암서원 이전 터에 남아있는 경앙문(景仰門)과 구암서원 안내판을 들여다보고 나오는 길 벽면에 쓰여져 있는 서거정(徐居正)의 시 ‘봄날(春日)’이란, “수양버들에 연록 물오르고, 옥(연록)빛은 매화엔 떠났다네, 연못의 봄 물빛은 이끼보다 더 푸르다네. 봄철 걱정과 봄날 즐거움엔 어느 게 깊고 얕겠는가? 제비는 (아직) 오지 않았고 꽃도 피지 않았다네(金入垂楊玉謝梅, 小池新水碧於苔. 春愁春興誰深淺, 燕子不來花未開).”를 읽으면서 섭섭함을 달랬다.

◇금호 동쪽 물섶에 옹기종기 모여서

서원(書院, college)의 시원은 당나라 현종 724(開元12)년으로 낙양자미성에 여정서원(麗正書院)을 설립하여 725년에 집현전으로 개원했다. 송나라에서 들어와서 주자의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이 도학연마도량(道學鍊磨道場)으로 보급되어 정제화되었다.

서원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건 세종원(1418)년 11월 3일에 “인사(人事) 마땅히 행해야 될 조목들로 서원을 유시했다(上諭中外臣寮...其有儒士私置書院). 1439(세종21)년 조정 군신 회의에서 교육발전을 위한 사업으로 송대(宋代) 서원제도의 학령(學令)을 논의했으나 성균관과 의정부의 검토의견에 따라 시행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나라 서원 역사는 1542(중종36)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오늘날 영주군 순흥면에 지역출신 유학자 안향(安珦) 선생을 배향하는 사묘를 설립하고, 유생교육의 강학당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는 명칭으로 시작되었다. 1548년 풍기군수 이황(李滉)이 사액(賜額)을 국왕에게 요청해서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현액을 하사받았다. 이후 21년이 지난 대구지역에서는 1563(명종18)년 오늘날 동구 지묘동에 ‘연경서원(硏經書院)’이란 이름으로 지역 최초 사액서원이 설립되었다.

연경서원에서 유풍(儒風)과 문풍(文風)을 선도했던 수서원(首書院)으로, 퇴계 이황, 한강(寒岡) 정구,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3인과 함께 별도로 향현사(鄕賢祠)를 세워 계동(溪東) 전경창 및 매암 이숙량을 제향했다. 퇴계선생문집 서원십영(書院十詠) 시 가운데 ‘화암서원 대구’라는 제목으로 “그림 같은 빼어난 바위가 그렇게도 어렵게도 그려졌는데, 배움터전이 마련되자 서로들 불러모여 사서육경을 경독암송하였다네. 이곳에서 시작되어 윤리도덕과 학문을 밝히는 등불이 켜졌다니(從此佇聞明道術), 몽매했던 뭇 백성들을 불러다가 일깨워 줄 수 있었겠지.”라고 읊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 1602년 중건, 1613년 사당 건립, 1622년 한강 정구, 1706년 우복 정경세를 제향, 1635년 향현사를 건립하여 계동 전경창과 매암 이숙량을 제향,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2011년부터 지역에선 복원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백원서원은 동구 도동 달성서씨 문중서원으로 1693(숙종18)년 백안동에 건립되어 효자였던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 1578~ 1665)을 제향하고 있다. 처음에는 백안동에 세워졌으나 1868(고종5)년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 현재 도동 478번지 위치엔 전귀당(全歸堂) 선생의 생전 강학소 자리에다 복원했다. 사우 경덕사(敬德祠)와 서시립 효행비각이 세워졌다. 서원명칭 ‘백원(百源)’은 조선 세조이후 우리나라의 윤리교과서로 애독했던 ‘명심보감 효행편’에서 “효행은 인간으로서 모든 행동에 근본이 된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외에도 청백서원은 백안동에 1729년(영조 5)에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하여 청백리 병조참판 이영(李榮, 1494~1563, 武臣)을 봉안하였다. 1558년 제주목사를 역임하고 귀향할 때에 “손에 쥐었던 말채찍 하나도 관물(官物)이라고 관청 벽에 걸어놓고 왔다(手中鞭也公, 掛其壁上了).”고 해서 괘편당(掛鞭堂)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후손들이 청백사(淸白祠)를 세웠고, 청백서원(淸白書院)으로 승격되었으며, 좌찬성 정수충(鄭守忠, 1401~1469)을 추배(追配)하였다. 그러나 고종(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동산서원은 경주최씨 대암공파 세거지(옻골) 출신 백불당(百弗庵) 최흥원(崔興遠, 1705 ~ 1786)을 제향하는 동천서원으로 1820(순조20)년에 수성구 만촌동 건립되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17년 아파트단지가 편입되면서 동구 둔산동 옻골마을 백불당고택(百弗堂古宅) 앞으로 이전되어 동산서원(東山書院)으로 개명했다. 최흥원은 조선왕조실록에 7회(국역 5회, 한문본 3회)나 나오는 역사적 인물로 시작은 선조26년 3월21일자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고 군량수송, 명군의 진력, 호남방어 등을 논의하다.”이고 마지막은 정조7년 2월19일자 “전 주부 최흥원은 행실만 훌륭할 뿐만 아니라, 재물을 내어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였으며(前主簿崔興遠, 行誼不但有可稱), 집안에다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곳집(庫)을 갖고 있었으며, 이웃 사람들이 일정한 부역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나, 향약(鄕約)으로 권장해 가르쳤다.‘고 하였다. 이왕 들었는데 어찌 등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予豈以利祿誘之哉)?”는 기록이었다.

유호서원(柳湖書院)은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 518번지 불로고분공원 남쪽에 있었다. 1784년(정조 8)에 곽재겸이 거주하는 서재를 건립하였는데, 이곳은 병조참판 이영의 옛집이다. 송담 채응린과 괴헌 곽재겸을 봉안했다. 서원의 명칭은 유계(柳溪)와 금호(琴湖)의 두 글자를 취하여 유호(柳湖)라 최흥원이 명명했다. 이후 유호서원(柳湖書院)이라고 했다가 고종(대원군) 때 훼철(毁撤)되었다.
 

 

권택성<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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