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향교·서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배움터 열어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향교·서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배움터 열어
  • 김종현
  • 승인 2023.12.06 21: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7) 금호 북쪽 집성촌의 배움터를 찾아서
문중이 서당·정사 등에 모여 묘산 기획
경주 최씨 배움터로 구회당·경운재 등
동구엔 신숭겸 장군 배향 재실 표충재
금호 북녘 물섶에는 ‘공맹의 고향’
공자가 살았듯이 금호강을 泗水로
오늘날 사수동·하빈면으로 갈려져
동산서원
대구에 세워진 많은 서원 중 하나인 동산서원.

◇배움터는 따로 없이 언제 어디서나!

1551(명종6)년 51세 퇴계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배우는데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인가? 시골에서 배우던 서울에서 배우던 오직 뜻을 이루는 것에 달렸을 뿐이다.”라고 썼다.

이와 같은 현상으로 인해 금호 동쪽 물섶에 옹기종기 모였던 집성촌에선 향교나 서원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배움터를 열었다. 서당, 정사, 당 혹은 재실 등에서 문중이 모여서 묘산(廟算)을 기획하고 서로 교학상장을 도모했다. 오늘날 동구에서 향학열이 가장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경주최씨의 배움터로는 도동 구회당(九會堂) 및 경운재(景雲齋), 둔산동 보본당(報本堂), 봉무동 경지당(敬止堂)과 독암서당(獨巖書堂), 용수동 농연서당(聾淵書堂), 옻골(둔산동) 동계정(東溪亭), 봉무동의 봉무정(鳳舞亭), 지묘동 다천정(茶川亭)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재실로도 영모재(永慕齋), 원모재(遠慕齋), 첨모재(瞻慕齋), 유강재(濡降齋) 및 직지재(直止齋) 등이 남아있다.

다음으로 인천채씨(仁川蔡氏)의 배움터로는 미대동 성재서당(盛才書堂)과 추원재(追遠齋) 및 첨송재(瞻松齋), 미묘동 대곡정사(大谷精舍) 및 대곡재(大谷齋), 내동 야산정사(冶山精舍) 및 지묘동 요수정(樂水亭)이 있다. 경주이씨의 배움터로는 송정동 서벽정(棲碧亭), 영모재(永慕齋) 및 원감재(遠感齋) 그리고 월성이씨(月城李氏)로는 사복동의 오우당(五友堂)이 있다.

이외에도 봉무동 단산(斷山)에 성주배씨의 친목당(親睦堂), 부동 성산여씨(星山呂氏)의 친목당(親睦堂), 평광동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첨백당(瞻栢堂), 동내동 장수황씨(長水黃氏)의 동호서당(東湖書堂)이 있고, 내곡동 김해김씨의 모의정(慕義亭), 신용동(龍津) 교하노씨(交河盧氏) 계남정(桂南亭), 중대동 행주은씨(幸州殷氏)의 동산정(東山亭)과 옥천전씨(沃川全氏)의 애산정(愛山亭), 평광동 단양우씨(丹陽禹氏) 경희정(景喜亭)과 경주김씨 서남정(棲南亭) 그리고 단양우씨(丹陽禹氏)의 와용정(臥龍亭) 등이 있고, 성씨에 한정되지 않고 대명14현을 모시는 효목동 경현당(景賢堂),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에서 도동에 지은 구로정(九老亭) 그리고 동촌 구룡산 마루에 아양음사(峨洋吟社)가 세운 아양루(峨洋樓)가 있다.

다시금 재실을 따로 모아보면, 내곡동 달성서씨 심락재(尋樂齋), 내동 문화유씨(文化柳氏) 광사재(廣思齋), 현풍곽씨의 시사재(時思齋),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충무재(忠武齋), 일직손씨(一直孫氏)의 추보재(追報齋)가 있고, 동내동엔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녹봉재(鹿峰齋), 장수황씨(長水黃氏)의 승방재(勝芳齋)와 영사재(永思齋)가 있다. 둔산동에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의 모원재(慕源齋), 옥산전씨(玉山全氏)의 추모재(追慕齋)가 있으며, 부동엔 곡강최씨(曲江崔氏)의 귀후재(歸厚齋),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월천재(月川齋)가 있다.

백안동에선 김해김씨의 영안재(永安齋)가 있고, 숙천동엔 성주배씨의 오산재(烏山齋), 달성서씨의 원모재(遠慕齋)가 있다. 신서동엔 문화유씨의 이리재(二履齋), 용계동 성주이씨 이로재(履露齋), 달성서씨 첨모재(瞻慕齋)가 있다. 평광동 단양우씨(丹陽禹氏) 도암재(島岩齋)와 평산신씨의 모영재(慕影齋) 등이 있다. 여기서 모영재(慕影齋)는 동구 평광동 108번지에 평산신씨 문중재실로 옛날 대비사(大悲寺)가 있던 자리에 있으나 6㎞ 정도 떨어진 표충재(表忠齋)와 같은 종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각유허비(影閣遺墟碑)가 있고 그 아래 100m 정도 영각을 추모하는 재실로 모영재가 있다.

이외에도 평산신씨에 관련된 표충재는 동구 지묘동 고려 개국공신 장절공(壯節公) 신숭겸 장군의 충정을 배향하는 평산신씨 재실로 설립하였으며, 1607(선조40)년 경상도관찰사 유영순(柳永詢, 1552~1630)이 지묘사(智妙寺) 터에 순절단(殉節壇)과 ‘충렬사(忠烈祠)’를 건립했으며, 1670(현종11)년에 중수, 1671년에 ‘표충사(表忠祠)’로 사액이 내려왔다. 일명 ‘표충서원’으로 호칭하였으나, 1871(고종8)년에 훼철된 뒤로 순절단을 본거지로 재사를 신축해 제향하고 있다.

◇금호 북녘 물섶(북구)의 추로지향(鄒魯之鄕)

팔공산 아가씨의 치맛자락 폭에 싸여 있는 금호 북녘 물섶에는 지명만 봐도 ‘공맹의 고향(鄒魯之鄕)’이다. 공자가 살았다는 노나라의 도덕과 윤리가 살아있는 노곡 혹은 논어실이라는 동명이 아직도 살아있다. 또한 도덕산(道德山)에서 흘려내려 팔거들을 적시는 반포천(反哺川), 태산 아래 사수가 흘려가는 물섶 곡부(曲阜)에 공자가 살았듯이 금호강을 사수(泗水)로 칭했다는 옛이름 사빈(泗濱)은 오늘날 사수동과 하빈면으로 갈려졌다.

이곳과 관련 한강 정구 선생은 선조6년 12월18일자 불차탁용(不次擢用事傳敎) 되었음을 시작으로, 고종39년 2월 5일자 “숙종 때 제문에서 선정(先正)이라고 표현한 것”까지 198회이나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이다. 특히 추천, 평판, 포상, 선정 등으로 많을 일화를 남기신 분이다. 그는 75세 노령에도 청주정씨 문중강학소에서 벗어나 지역후학 양성을 위한 ‘사빈서재(泗濱書齋)’를 열어 85명 문하생들의 학문도량이 됐다.

1614년 5월에는 ‘사양정사’를 세웠다. 오늘날 용어로 영남유림 낙중학(洛中學, 낙동강 중류의 학파)의 본거지를 마련했다. 그런데 1694(숙종20)년 신동 웃갓마을(칠곡 지천면)로 이건했으며, 2011년 사수동 한강공원내에 복원했다.

‘한강선생 봉산욕행록’이란 기록에 의하면 봉산욕행(동래온천목욕행)을 추진한 12인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인 정천주(鄭天澍)는 사수동에 있는 자신의 은거지를 한강선생을 경원한다는 의미로‘경한재(景寒齋)’를 세워 후생가외(後生可畏)를 꿈꿨다. 1933년부터 1935년까지 3년간 보급되었던 지리교과서 ‘조선환여승람’기록에 의하면 사수동에 세거지를 형성했던 동래정씨와 야성송씨 문중에서는 ‘문양서당(汶陽書堂)’을 열어 한강맥통을 이어왔다.

이에 이어 사수동 인근 매천동에서는 1705(숙종31)년 야로송씨(冶爐宋氏)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 1548~1615)를 향사(饗祀)하고자 매양서원(梅陽書院)을 건립했으며, 이후에는 송명기(宋命基, 1680∼1755), 송이석(宋履錫, 1698~1782) 부자(父子)를 추가배향, 1868(고종5)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6년에 사당(尙賢祠) 앞에 복원했다. 아헌(啞軒) 송원기(宋遠器)는 1610(광해군2)년 문과급제해 관직에 진출, 광해군의 폭정을 간하는‘육강소(六綱疏)’를 올렸으나 국왕이 불윤(不允)하자 득병낙향해 이곳에서 강학후생했다.

태조실록에서 태종실록까지 조선왕조실록에 101번이나 기록된 조선 건국공신이었던 오천(烏川) 이문화(李文和, 1358~1414)는 마지막 기록인 태종14년 6월1일자 행장졸기(行狀卒記)가 등재되어 있었고 이를 추모하는 후손들이 서계서원(西溪書院)을 세웠다. 뒤에 화수정(花樹亭)으로 부르다가 1871(고종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87년 서원복원과 서계서원사적비(西溪書院事績碑)를 건립, 1992년 4월에 ‘서계서원’현판을 붙였다. 1824(순조24)년 검단동에 서산서원이 설립됐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 이후 영남의 선비들은 붓으로 하는 ‘대의명분으로 바로잡기(正名爲政)’보다 ‘국가의 위험을 보고 목숨까지 내놓겠다(見危授命)’는 한말의병으로 칼을 잡았기에 서원설립이 멈춰버렸다.
 

 
글·그림=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