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이 91세 넘은 작가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평생 다해
그것은 단순한 끈기·인내 아닌
자신의 삶을 사랑했다는 증거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그림을 놓지 않은 작가
그런 취지에서 서울 한가람미술관에서 이달 1월 31일까지 전시 예정인 미셸 들라크루아의 프랑스 벨에포크 전시는 연말연초 어떤 마음의 태도로 내 삶을 바라보며 채워나가야 하는지를 한 번 더 일깨워주는 전시가 되어줄 것이다. 올해 나이 91세가 넘은 작가 미셸 들라크루아는 프랑스파리지앵 화가이다.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평생을 다해왔다. 그의 그런 열정은 단순히 끈기나 인내에 의한 것이 아닌,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 사랑해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즐길 수 있었기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벨에포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프랑스가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웠던 시대로, “아름다운 시절, 좋은 시절”로 해석할 수 있다. 한 편으로 이번 전시는 그의 가장 행복했던 인생의 순간들을 담은 개인의 회고록일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 제목 중에는 “파리를 사랑해”라는 그림이 있다. 작가의 방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의 파리 풍경을 담아낸 그림인데, 제목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자신을 이루는 소소한 일상들을 있는 그대로 애정해 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평생을 살아온 파리라는 작은 도시를 그는 온 마음을 다해 느끼고 사랑하며, 차곡차곡 추억해 온 것이다. 그러니 그의 작품 하나하나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림들은 하나같이 정겹고, 그리운 그 시절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고 있다. 알록달록한 프로방스풍 건물 창가에 꽃 화분들, 빨래를 널고 있는 사람, 건물 굴뚝에선 연기가 피어오르고, 빗속을 뛰어가는 사람들, 손님을 배웅하는 상점 상인들과 거리에서 입맞춤을 나누는 애틋한 연인들의 모습 등 사람 냄새나는 일상의 디테일함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총 8개의 테마로 나누어진 전시 작품들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도 모두 만날 수 있다. 미셸 들라크루아의 그림 감상은 91세 할아버지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는 어린 시절의 동화 같은 어여쁜 감성들과 만나는 일이다. 거리마다 꽃 다발을 사고파는 수레와 초록이 싱그러운 정원, 가을 낙엽이 굴러다니는 공원, 눈 내리는 파리의 겨울 밤거리까지. 특히, 촘촘하게 캔버스 위를 흩날리는 하얀 눈꽃 송이들은 너무도 정교하고 아기자기해서 어떤 기법으로 그려졌는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는 파리지앵 화가할아버지의 그림들을 보며, 어쩌면 이렇게 오랜 세월 때묻지 않은 감성으로 예쁜 색감들과 아기자기한 장면들을 표현할 수 있는지 삶을 대하는 그의 마음의 자세가 너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작가 미셸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원화 이상으로 판화 제작에도 애정을 가졌다. 현재는 소량만 남아있거나 전 세계적으로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판화들도 있다. 판화에도 종류가 많은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무판화, 목판화가 아닌 석판화와 세라그라피라는 두 가지의 평판화 기법을 사용했다. 석판화는 물과 기름의 발발 원리를 이용해 찍어내는 기법이고, 세라그라피는 실크스크린으로 불리는 감광액과 빛을 이용한 필름 작업으로 찍어내는 기법이다. 아크릴 물감으로 그리 그림은 붓 터치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입체감이 느껴지지만, 평판화 그림은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인쇄한 것처럼 매끄럽고 정교한 느낌이 두드러진다.
전시를 보면 가장 최근 그린 작품일수록 붓 터치감이 비교적 거칠게 표현됨을 느낄 수 있는데, 작가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기는 정교함의 변화일 것이다. 어쩌면 예술가로써는 마음 아픈 현상일 수 있지만, 한 편으로 그런 모습까지도 그대로 안아주어 하나의 예술로 남는 것이 그림이다. 이보다 더 예술 같은 삶이 있을까. 미셸은 아무리 어려운 순간에도 그림을 놓지 않았다. 되려 그림이 자신을 끊임없이 선택해온 것이라 말한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림에 대한 애정과 떠오를 수밖에 없는 지극히 행복했던 시간들이 그에겐 이토록 전부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곱씹어 보면 삶이 그림이고 그림이 삶이였던 자신에의 사랑이라고나 할까.
전시를 감상하는 내내 행복함과 사랑스러움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가진 사랑이라는 에너지때문이었다. 삶을 지탱하는 마음의 자세는 결국엔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오래도록 깊어질 수 있는 애티튜드가 아닐까. 자신을 삶의 모습을 디자인하는 것은 마음의 태도에 달려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의 무료하도록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내가 생각하기에 따라 달려있다. 벨 에포크의 그림들처럼.
류지희 <디자이너·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