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여인호
  • 승인 2024.02.05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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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1912~1996)은 천재 시인입니다. 인물도 정말 좋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우리 조상(?) 중에 백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에 나왔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배우가 다른 무엇도 없이 오직 잘생긴 것만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던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는 한없이 잘생겨서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원빈이나 정우성 배우가 있는 것처럼 백석 시인도 너무나 잘생겨서 그냥 시대를 흔들어 엎었습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가장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입니다. 작품을 읽으면 초중등 어린 독자들은 사실 이게 뭔가 할 것이고, 고등학생쯤 되어야 입시에 필요하니까 억지로 물고 뜯고 씹고 맛보고 할 것입니다. 재미고 뭐고 없겠죠. 그런데 이것은 남녀노소 누구나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뭔지도 모르고 읽기만 하면 되는 작품입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탸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에 눈이 내린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나는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면 안 되는데 사랑해서 눈이라는 벌을 푹푹 받는 건지, 아니면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멋진 남자인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하늘이 축복으로 눈을 푹푹 내려주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고요.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겠구나 그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실 백석 시인은 가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타샤는 실제 인물이 아니고 유명한 러시아 고전 소설의 주인공 이름일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몸은 안 가난하지만 마음은 가난하고 생각하는 시인이 소설의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시입니다. 문학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우리 생활에 문학이 있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시인이 아니었다면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탸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에 푹푹 눈이 내린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인이 뭘 생각해서 그렇게 썼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쓸 수 있구나, 저게 시를 쓰는 것이구나 느끼면 그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뭔가 우리가 발 붙이고 사는 현실 세상과는 잠깐이라도 좀 다른 순간이 느껴진다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사랑을 응원하는 가장 멋진 표현 중에 하나입니다. 가난하지만 나는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냥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글로 씁니다. 이것이 문학이고 몇백 년이 흘러도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을 읽는데 감동이 다르지 않습니다. 일상에서는 좀 이상하고 왜 저렇게 쓰나 하는 것을 써서 읽기에도 조금 이상한데, 거리감도 있고 어색함도 있는데 그냥 괜히 눈길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기억에 남습니다. 어색하고 낯설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은 느낌이랄까요.

나타샤가 외국의 절세 미녀라 해도 좋고 당나귀가 고급 승용차라도 좋습니다. 나타샤가 평범한 이웃 처녀라도 좋고 흰 당나귀가 차를 못 사서 굴리는 자전거라도 좋습니다. 그게 어떻게 이해되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머리만 복잡하다고 버려도 좋습니다. 그냥 이 작품이 우리에게 남아 언젠가 누구는 여기에서 의미를 찾으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요. 다시 말하지만 시를 이해 못해도 되고 마가리가 뭔지, 당나귀가 왜 우는지, 그런 것 다 몰라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냥 이상하다는 느낌 계속 가져도 됩니다. 문학이고 예술이니까요.

겨울이 오고 눈이 날리는 날에 사람들 중 누구는 이 시를 생각합니다.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지 그러나 이 시를 아는 사람은 이 시가 떠오릅니다. 괜히 그렇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아무 것도 몰라도 눈 내리는 날 나타샤를 떠올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지금도 이 시를 읽고 이해도 못하고 재미도 못 느끼며 고개만 갸우뚱해도 됩니다. 그렇지만 희한하게도 이 시는 어느 순간 일부라도 기억에 남아 언젠가 눈 내리는 날 떠올리고 다시 찾아보고 싶게 될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사람은 전부 그랬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에는 어떤 것이 더 있을까요?

대구서재초 교사 김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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