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언대>사사로운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았다
<발언대>사사로운 편지는 뜯어 보지도 않았다
  • 승인 2011.10.2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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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때 문신 유의는 신중한 언행으로 오랫동안 벼슬살이를 하고 목민관으로 나가서는 검소함과 위엄으로 고을을 평안하게 했다고 한다.

유의는 매우 검소하여 한 고을을 다스리는 직위에 있으면서도 찢어진 갓과 성근 도포에 찌든 색깔의 띠를 두르고 조랑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또한 이부자리는 남루하고 요나 베개도 없었다. 생활이 이러하니 저절로 위엄이 서게 되고 형벌을 내리지 않아도 고을이 다스려졌다고 한다.

그러나 유의가 단순히 검소함만으로 뛰어난 목민관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업무에 있어서 매우 철저하여 사소한 청탁을 받지 않았고, 절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정약용이 유의에게 말했다. “나라의 일에 있어 단 하나의 어그러짐도 허용할 수 없는 것이지만, 지나치게 융통성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 그러자 유의가 대답했다. “임금께서 나를 홍부의 목민관으로 임명하신 뜻은, 홍부의 백성을 나에게 맡겨 그들을 구휼하고 비호하도록 하신 것이네. 조정에 있는 고관의 부탁을 비록 무겁기는 하나 어찌 임금의 명보다 높겠는가. 만일 내가 편파적으로 한 사람만 찾아보고 특혜를 준다면 이는 왕의 명을 어기고 한 사람의 사사로운 명령을 받드는 것이니 내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는가.” 정약용이 이를 듣고 감복해서 말을 잇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번은 정약용이 편지를 올려 공무를 의논하였으나 답이 오지 않았다. 후에 홍주에 가게 되자 유의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답장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까?” 유의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홍주의 목사로 있으면서 단 한 번도 편지를 뜯어 본 적이 없네.” 그리고는 심부름하는 아이에게 편지통을 가져와 정약용에게 보이도록 하였다. 정약용이 편지통을 쏟으니 과연 모든 편지가 하나도 개봉되지 않은 상태로 들어있었다.

잘 살펴보니 모두가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보낸 것이었다. “이러한 편지야 물론 뜯어보지 않는다지만 저의 편지는 공무와 관계된 것인데 어찌 뜯어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공문을 보내면 될 것이지 왜 사사로이 편지로 보낸단 말이오” “그 일이 비밀에 속한 것이기에 남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한 것입니다.” 그러자 유의가 정약용을 나무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비밀히 공문으로 보내면 될 것이 아닌가?”

오래전 읽었던 글이다. 새삼스럽게 이 글이 떠오른 이유는 현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청탁을 받고 있다. 학연, 지역, 혈연에 얽혀 자연스럽게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을 세상사는 이치라 여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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