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논단>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대구논단>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 승인 2011.10.30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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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건(대구대 영어교육과 교수)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 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노랗게 바래가는 은행나무 잎들과 계절의 분위기가 섞여 감정의 기복이 불규칙해지던 어느 날, 학교로 들어오는 길에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가요의 가사가 귀에 뚜렷하게 와 박힌다.

그 소리를 좇아 잠시 잠깐 시월의 어느 날을 정지시키고 시각과 청각을 동원하여 가을 풍경을 감상하는 동안, 이제 막 대학 중간고사를 마친 아이들의 환한 얼굴들을 발견한다. 비싼 등록금과 학점관리와 취업걱정 같은 현실을 외면하고 바라본 아이들의 모습에서 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이 눈에 띄고, 전에 생각 못했던 것이 내 의식을 잡아챈다.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각자 사랑하는 대상이기도 할 것이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해 사랑과 희생을 자처하며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수도 있다. 인간의 감정 중 어느 대상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하여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 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감정일까. 이것은 깊은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드러나는 다른 선택을 인정하는 관용의 태도이기도 하다.

빠르게 진행되는 이 사회 안에서 관용은 없어 보인다. 대상이든 현상이든 관용 안에서 발휘되는 판단의 유보는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각자의 삶은 과장되어 부풀어 있고, 사고의 폭은 타자에 의해 주어진 범위 안에 머물러 있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구성된 개인의 가치의 세계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주어진 구체적 삶의 환경이 사람이 사는 세계이다’ 라는 인문학적 사고관이 돋보여야 할 요즘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최근 소식 하나를 떠올린다. 러시아의 젊은 수학자 그리고리 페렐만(Grigori Y. Perelman)이 학자로서의 최고 영예인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자격을 거부한 사연이다. 학자라면 누구나 욕심을 내는 최고의 영예를 자신 밖으로 걷어낸 것이다. 더욱이 페렐만은 2006년 현대 수학의 최대 난제 가운데 하나를 푼 공로로 수학 분야의 노벨상 격인 `필즈 메달’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나의 증명이 확실한 것으로 판명됐으면 그만이며 더 이상 다른 인정은 필요 없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하는 대신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 집 근처의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갔다. 페렐만은 뒤이어 2010년 3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세계적 권위의 클레이 수학연구소에 의해 `밀레니엄 상’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 이 상도 거부해 더 큰 화제가 됐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페렐만은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방 두 칸짜리 낡은 아파트에서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이들은 고정적인 직장이 없는 페렐만이 가끔 개인 과외로 버는 많지 않은 돈과 노모의 연금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학자로서의 성취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거부하고 물질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는 그가 사회의 잣대로 보면 지질하고 궁상맞아 보인다. 그러나 곰비임비 생각해보면 그의 판단은 도저하다. 그의 모습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신이 생각대로 선택하여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유 속에 태어났지만, 어디에서나 사슬에 묶여 있다’는 경구를 떠올리게도 한다. 일상의 걸음의 폭을 좁혀 생각을 유보하는 느리게 가는 그의 삶이 가을 햇살처럼 소슬하지만 눈부신 순간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길을 걷는 동안 나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 시월, 이 상념의 계절은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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