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 아침- 새해, 내 몸에 남길 흔적
달구벌 아침- 새해, 내 몸에 남길 흔적
  • 승인 2013.01.02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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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대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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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코리아가 된 제자를 만났다. 역시 미스 코리아는 아름다웠다. 자태와 시선, 몸가짐은 물론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품격이 있었다. 여고시절 그 아이가 교복을 입고 예쁘게 튀어나온 뽀얀 이마에 땀방울이 스미도록 뭔가 열심히 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녀는 미스 코리아가 되기까지 얼굴의 턱 선을 갸름하게 유지하기 위해 껌을 씹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고운 살결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리 더워도 짧은 팔 옷은 입지 않았다고 했다. 참 쉬운 일이 없다 싶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클래식 음반 제작 부문에 그래미상을 수상한 조카 황병준이 인터뷰 하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았다. 조카는 나와 네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어릴 적에 형제처럼 자랐다.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가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서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 얼마나 오랜 시간을 피아노 의자 위에 앉아서 연습을 했던지 하루 만에 팬티가 다 떨어져버린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서 음반을 함께 들었다. 스튜디오 공간 구석구석에 그의 삶의 이력과 흔적이 그윽하게 배어 있었다.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를 쓸 때 얼마나 집중하고 치열하게 고민을 했던지 생 이가 빠지는 것을 뱉어내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는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꼿꼿이 앉아서 쓰는 바람에 중력을 이기지 못한 몸속의 내장이 전체적으로 내려앉아 버렸다고 한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가락은 하루 19시간의 고된 연습으로 분홍색 토슈즈 안에 감추어진 채 가슴이 아프도록 망가졌다. 안네 소피 무터와 같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손가락에 현이 새겨지고 턱에 굳은살이 박인다고 한다.

내 몸에는 치열한 삶을 산 흔적이 무엇으로 남아있을까? 고교시절 기타를 배우면서 손가락 첫 마디에 줄이 새겨지고 손끝이 부어오를 때 그 아픔을 참지 못하고 그만 두어 버렸다. 지난 해에는 골프를 등록하고서는 며칠 못 가서 포기했다. 공부고, 운동이고, 취미 생활이고, 시작할 때 구입한 교재와 기구와 용품들은 집에 쌓여만 가는데 내 몸과 정신에 새겨진 그 무엇은 이거다 하며 내 놓을게 없다.

찾고 또 찾아보니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의 첫째, 둘째 마디가 비틀어진 것을 찾았다. 학창 시절 하도 빡빡이 숙제와 공책 필기에 시달리다 생긴 흔적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흔적은 웬만한 내 친구들은 다 갖고 있다. 요즘은 손으로 하는 필기보다 컴퓨터 자판으로 글 쓰는 일이 많다보니 이것조차도 거의 지워지고 없다.

이것뿐인가 싶었더니 한 가지 더 있다. 부끄럽지만 둥글하게 부풀어 오른 뱃살이다. 얼마나 많이 먹어서 이렇게 되었을까 싶다. 아, 내 몸 전체에서 가장 치열하게 산 흔적이 먹으면서 나온 배라 생각하니 스스로 무안하고 또 미안하다. 이런데도 오늘 저녁 좋은 사람들과 만나면 또 먹으면서 얘기하지 싶다. 좀 덜 먹어야지.

새해가 되니 더 많은 일을 더 열심히 더 잘하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하고 싶은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기억으로는 챙기지 못할 정도가 되어 새해 다이어리를 샀다. 연간 계획, 월간 계획, 일일 시간 관리 스케줄이 나의 새해 일정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날 어설프게 살았던 하루하루 내 삶은 축적되지 않고 소진되었다. 날이 갈수록 겉사람이야 소진되어 낡고 허름해질 수밖에 없다하더라도 속사람은 하루를 살수록 더 성장하고 풍성해지는 새로운 삶을 누려야 하지 않을까.

새해에는 텅 빈 다이어리처럼 내 삶을 포맷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익숙하게 자동화된 습관에 따라 움직인 일상들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 낯설게 느끼고 싶다. 이미 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다고 생각하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지금부터 새롭게 교섭하는 그대로 관계를 만들어가고 싶다.

새해의 시작을 어린아이가 첫 걸음마를 걷는 긴장과 감격으로, 동시에 익숙하고 세련된 매너로 무대 위를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예술가처럼 살고 싶은 것이 새해를 맞는 지금의 내 심정이다. 그리하여 내 몸과 영혼에 둥글하게 부푼 뱃살이 아니라 아름답고 치열한 삶의 흔적이 지문처럼 남을 수 있도록 살고 싶다.

그러나, 지난 해 마감하지 못한 일들, 청소해야 할 집안 가득한 잡동사니, 정리되지 않는 컴퓨터 안의 파일, 종결되지 않은 각종 문서가 나의 새해 첫 날을 열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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