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을 말하기 전에 장발장처럼
이념을 말하기 전에 장발장처럼
  • 승인 2013.01.07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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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진 오
대구대 인문대학 국문과 교수
세상의 일이라는 게 선과 악으로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편의적으로 나누며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이런 속 좁은 생각을 교정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어떻게 하다 보니, 재직 대학에서 본부 보직을 한 이년여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세상이라는 게 그렇게 간단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걸 체감했다. 세상의 일만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람을 알고 이해하는 일 역시 녹록치 않았다. 저 혹독한 전두환 독재 체제에서 대학을 다녔던 나로서는 꼭 학생운동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흔히 보수연하는 인사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반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인사들에 대해서는 마음 한편으로 공경한 게 사실이었으니, 이와 같이 20대에 형성된 내 나름대로의 논리는 나이가 들어도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본부 보직자로서 이렇게 저렇게 만난 이들 중에는 흔히 말하는 보수 인사들이 적지 않았다. 이 인사들 중에는 소위 ‘수구꼴통’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건강한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냉전에서 기원한 한국 보수주의의 한계와 병폐를 인정하면서도 건강한 보수의 전망을 모색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보는 언제나 선하며 착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여전히 믿음과 신뢰를 주는 진보 인사도 있었지만 나 홀로 정의와 진실을 독점한 듯 판단하고 툭 하면 가르치려들면서도 자기 잇속은 다 챙기는 사이비 진보 인사도 적지 않았다.

요컨대 보수와 진보는 그 자체로 악이거나 선이 아니었다. 문제는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그 이념 뒤의 사람이었다. 사람이 문제지 도대체 보수와 진보가 뭐가 그리 문제이겠냐는 때늦은 반성을 이제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하고 있다. 정체성의 정치학이랄까, 그 편협한 정치학과 이젠 결별해야 하지 않느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이런 고민이 깊어가던 차에, 요즘 유행한다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게 되었다. 듣던 대로 몰입도가 놓은 영화였다. 영화는 굶어 죽어가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쳤다가 19년 옥살이를 한 장발장의 가석방으로 시작된다. 어디를 가든 관에 신고해야만 하는 처지의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선처로 그의 관저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여기서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장발장은 관저의 값나가는 은그릇을 훔쳐 도망가던 중 경찰에 붙잡혀 주교 앞으로 붙들려온다. 무릎 꿇린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는 은촛대까지 내주면서 왜 함께 가져가지 않았냐며 그를 변호해준다.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 장발장을 변화시키는 순간이다. 애초 미리엘 주교는 장발장을 처음 만날 때부터 가르치거나 요구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으로 대해주고 받아준 것이었다. 이 미리엘 주교의 사랑이 증오와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던 장발장을 구원한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장발장의 혁명, 즉 사랑의 혁명이 시작된다. 그는 사랑의 감각으로 가난한, 버려진, 약한, 상처받은 타자들을 구원하면서 더욱 본질적으로는 강렬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자기를 구원한다. 물론 이 영화는 장발장의 사랑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이 영화는 프랑스 근대사를 배경으로 억압적인 왕권체제에 저항하는 젊은이들의 민중 봉기, 즉 정치 혁명의 열정과 좌절을 동시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 젊은이들 중에 장발장이 애지중지 키운 코제트와 사랑을 교감한 청년 마리우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발장은 바리게이트로 진입, 교전 끝에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구해 두 젊은이의 사랑을 이어주고 끝내 코제트 곁을 떠난다. 장발장이 누구던가? 냉대와 멸시를 온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범죄자 아니었던가? 증오의 덫에 걸려 자신은 물론 타자들을 미워하며 살아간 시대의 루저 아니었던가?

그런데 영화에서의 장발장은 정직한 사랑으로 부조리한 세상과 마주함으로써 결국 증오의 덫을 끊은 힐링맨이었다. 그는 수많은 장발장을 살려냈고 수많은 장발장을 구원했다. 그는 가르치지 않았으며 지도하지 않았다. 그저 돕고 나누고 성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의 혁명을 이어나갔다.

영화는 나에게 말했다. 얄팍한 이념을 내세워 자신을 정당화하는 일 그만두라고. 그렇게 하기보다는 사랑의 감각으로 이 땅의 레미제라블들을 환대하며 살아가라고. 그렇다. 중요한 건 이념 그 자체가 아니라 장발장의 비우는 사랑일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할 것이다.

이념을 말하기 이전에 우리는 먼저 사랑의 혁명에 눈떠야 한다. 그래야 그 이념도 빛을 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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