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 짓는 아내, 때깔 내는 남편…부부애로 꽃피운 예술혼
옷 짓는 아내, 때깔 내는 남편…부부애로 꽃피운 예술혼
  • 황인옥
  • 승인 2014.03.0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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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부부 조동국·김영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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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연구가 김영희(사진 왼쪽)씨는 “처음에는 남편이 내 일에 관심이 없었다. 서예나 다도 등 자기분야만 팠다. 그러다 남편이 염색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지금은 남편은 남편대로 차와 염색, 서예의 연결고리가 완성되는 단계인 것 같고, 또 남편의 연결고리가 내 작품 안에서 부부애로 되살아나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흔히 한국 전통의 백미(白眉)로 선(線)의 미학을 꼽는다. 하늘을 향해 살짝 치켜 올라간 한옥의 처마, 나비의 날개를 연상케 하는 한복 옷소매 하단부의 곡선, 금동미륵보살 반가좌상의 흘러내리는 선의 우아함 등 한옥, 한복, 공예품, 불상, 춤, 정원에 스며든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한국 선의 아름다움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왜 선이었을까. 같은 동양이면서도 중국·일본과 차별되는 전통 한국 선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순응하며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던 조상들의 자연관과 무관치 않다.

김영희·조동국씨는 자연과 전통 선의 미학을 예술과 부부애로 승화시킨 보기 드문 잉꼬부부이자 예술가 부부다. 남편인 조동국씨는 서예가이면서 천연염색가로, 아내인 김영희씨는 한복연구가로 각자 분야의 장인을 목표로 긴 시간을 달려오면서도, 상대 방의 예술세계에 멋과 깊이를 더하는데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유려한 전통 선의 미학처럼 때로는 인생의 동반자로, 때로는 예술적 동반자로 함께 하며 서로 순응하고 수용하는 조화로운 30년을 만들어 왔다.

김영희씨, 한복연구가는 나의 천직
끊임없는 자기계발...달구벌 명인 선정

서예가 조동국씨, 아내 위해 염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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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복연구가 김영희씨의 한복 사랑

대구시가 지난해 지역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숙련기술인 우대풍토 조성을 위해 지역 최고 명장인 달구벌 명인 5인을 선정했다. 첫해 선정자 5인 중 김영희 한복연구가가 명단에 올라 명인증서와 함께 매월 50만원의 기술장려금을 5년 동안 제공 받게 됐다.

19개 산업분야, 86개 직종에서 최고 기술 보유자 5인으로 한복분야의 김 연구가가 첫 해에 선정된 것은 1981년 한복연구실을 개설한 후 지금까지 3천500여 벌의 한복을 만들고 58회 전시회를 열어온 것과, 창설 멤버로 대구경북한복협회를 만들고 두 번의 회장을 지내며 한복 발전에 힘써온 그녀의 독보적인 기술적·예술적 성과에 대한 사회적 인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첫 해 달구벌 명인에 선정된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한복에 있어서 지역 최고의 기술자로 인정 받은 것 같아 감격스럽고 행복하다.”

-30년 한 길을 걸어온 한복과의 첫 인연이 궁금하다.

“어릴 때부터 수놓고 뜨개질하는 것을 곧잘 했다. 바느질감을 잡았다 하면 끝장을 볼 정도였다. 그러다 언니가 서울에서 양장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해 디자인 학원을 다니게 됐다. 그때 한복 바느질을 접하게 됐다. 양장은 디자인하는 사람은 디자인만 하고 재단사는 재단만 하는데 한복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하는 시스템이어서 매력을 느꼈다.”

-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 한복업계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요즘은 명절에도 한복을 안 입는다. 결혼식 때 입는 것이 전부다. 한복수요가 급격하게 줄고 또 한복대여업이 생겨나면서 한복업계도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 살아남은 비결은 무엇인가.

“모든 일이 그렇지만 특히 기술 분야는 끈기와 집중력을 요구하는데, 오래 하는 사람들은 대개 이 두 가지 장점을 갖추고 있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취미에 맞아야 하는데, 다행히 나는 이 일을 천직처럼 좋아했고 일을 즐겼기 때문에 고비가 있어도 잘 넘겨 왔던 것 같다.”

김 연구가의 작업실에 한복 한 벌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한복을 리폼 한 것이라는 대답을 듣기 전까지는 패션쇼에 출품할 작품으로 여겨 질 만큼 염색과 디자인이 멋스럽고 우아했다. 언뜻 봐도 디자인과 바느질의 최고봉이 아니면 범접 할 수 없는 포스가 풍겨졌다.

- 경지에 오르는 것 쉽지 않다. 일이 편해지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지만 늘 자신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몸에 익어 익숙해지면 편안한 상태가 되는데 이때부터 자신감이 붙는 시기다. 자신감이 생기면 치마, 저고리의 기본형을 가지고 활옷, 원삼, 당의, 두루마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게 된다. 그런 일은 최소 10년은 우직하게 한 우물을 파야 가능하게 된다.”

- 김영희는 어떤 한복을 추구하나.

“유행보다 오래 입을 수 있고, 입기에 편안한 디자인을 선호한다. 한복은 자주 맞출 수 있는 옷이 아니기 때문에 유행이 지나면 아예 안 입게 된다. 그러면 안 되기 때문에 고객들에게 유행에 뒤지지 않으면서도 한복의 기본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편안한 디자인을 권한다.”

- 현대인들이 한복을 입지 않는다. 왜인가.

“마음의 여유라고 본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그에 따라 드는 돈도 더 많아져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졌고, 세상도 각박해졌다. 전통은 느림의 미학이다. 한복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결코 눈길이 가지 않는다.”

- 한복을 입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릴 때부터 한복을 입고 전통예절 교육을 접해야 한다. 어릴 때부터 입어봐야 어른이 돼서도 입을 수 있다. 지금 유치원에서는 한복을 입고 예절 수업을 하고 있는데, 그런 교육이 중고등학교까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생활 속에서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글로벌시대일수록 전통과 뿌리는 중요하다. 요즘 아이들 유학이나 해외 활동이 일상화되고 있다. 외국 나가서 세계인들과 교류하면서 세계인들이 우리 아이들에게서 보고 싶은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우리의 뿌리고 전통문화다. 실제 해외 유학생들이 가끔 우리연구소를 찾아온다. 외국에 나가보니 우리 얘기를 하고 보여줘야 하는데 전통을 너무 몰랐다며 한복에 대해 묻기도 하고 한복을 사가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기모노에 투영하는 자존감은 대단하다.

“일본인들은 기모노 입히는 자격증을 둘 만큼 기모노의 품격과 자부심을 유지해왔다. 우리 역시 한복을 입히는 자격증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복에 대한 내용과 품격이 훨씬 풍부해 질 것이다. 한복은 만드는 사람의 역할이 50이라면 입는 사람의 역할 또한 50일 만큼 입는 사람이 어떻게 한복을 소화 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한복의 매력은 무엇이며, 어떤 옷을 만들고 싶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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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웨딩드레스 패션쇼 장면.
“한복은 슬로우 패션이다. 선이 아름답고 우아하다. 한복을 입으면 일단 행동과 마음가짐이 조급하지 않고 편안해진다. 편안함과 우아함의 절정을 꼽는다면 한복웨딩드레스가 아닐까 싶다. 한복 웨딩드레스는 서양드레스 속에서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생각해 패션쇼 때마다 빠트리지 않고 다양한 디자인을 소개한다. 한복 드레스는 계속해서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다.”

- 학사, 석사, 국가기술자격증 취득 등 끊임없는 업그레이드를 해왔다.

“전통분야가 자격증보다 기능이나 기술만 우수하면 인정받는다는 생각이 팽배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전통도 대외적인 인정 증서를 가지고 있으면 훨씬 유리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학사와 석사를 하고 기능경기대회와 국가기술자격증 등을 취득했다. 후배들도 하나하나 시기마다 대외적인 인정서를 갖춰가기를 권하고 싶다.”

- 한복 발전 방안을 꼽는다면.

“다도가 발전하면서 다도인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 다도의 부흥은 전통문화가 발전하면 한복도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한복과 전통문화는 상호의존관계일 수 밖에 없다. 전통에 한복이 빠지면 전통의 품격이 살 수 없고, 전통이 발달하지 않으면 한복 수요층도 줄어들게 마련이다. 한복의 성장을 위해서는 한복 하나에만 포커스를 맞출 것이 아니라 전통문화 전반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



◇ 천연염색가 조동국씨의 염색 사랑

대뜸 조동국 염색가가 “직접 물들이고 쓴 글이라며” 멋스러운 스카프 하나를 내밀었다. 말하자면 그가 내민 스카프는 서예와 천연염색가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그의 명함이었던 것이다.

-천연염색이야말로 슬로우 패션 아닌가.

“천연염색은 자연이 생산한 재료들로 색을 내는 것이다. 자연이 재료를 키워내는 기간과 그것을 채취해 염료로 만들고 천에 수십 번 담그고 말리는 오랜 시간과 손길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천연염색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연염색 재료는 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 염색을 하기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좋은 패션 재료가 되는 것이다. 천연염색이 좋은지는 아이들이 금방 안다. 아토피가 현저하게 줄어들고 아이들의 얼굴에 웃음이 되살아난다.”

그는 현재 영천에서 지인 5명과 함께 협동조합 형식으로 한국전통염색학교를 운영하며 교장직을 맡고 있다. 영천시 농업기술센터 천연염색 위탁 교육처로 지정돼 일반인 팀과 어린이 체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염색학교의 구성은 어떻게 되나.

“염색과 친환경 생활용품 만들기를 주로 하는 일반인팀과 염색을 포함한 전통문화체험학습 위주인 유치원·초·중·고등학생 체험반이 있다.”

-학생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티셔츠를 직접 염색을 해서 말려서 집에 갈 때 입고 간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한다. 홍보가 많이 안돼 더 많은 아이들이 전통문화와 염색을 체험할 수 없어 안타까운데 시간이 지나면 입소문을 탈 것이다.”



◇ 부창부수(夫唱婦隨)의 부부 사랑

대명동에 위치한 부인의 연구소 벽면 여기저기에 물들인 천에 글을 쓴 남편의 작품들이 부인의 한복 작품들 속에서 나지막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편 조 씨가 염색하거나 글을 써 넣은 한복도 더러 보였다. 부부의 예술혼이 한 공간 안에서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서예는 오래했는데 염색은 10여년 정도 밖에 안됐다. 염색은 안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 매력에 푹 빠져 있다.”(남편)

“남편이 제 작품에 붓글씨를 쓰기도 하고 염색을 하기도 한다. 서로의 예술 세계가 한복 안에서 만나는 셈이다.”(아내)

인터뷰 내내 부부는 낮은 목소리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어갔다. 남편과 아내의 목소리톤도 닮아 있었고, 얼굴에 번지는 미소 또한 하나처럼 꼭 닮아 있었다. 30년 부부사랑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존경의 말들과 부드러운 낯빛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서른 중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서로 구제했다고 생각했지 귀한 존재인 줄 몰랐다. 아내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은 50이 넘어서부터다. 안사람이 인생의 동반자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아침마다 출근할 때 볼에 뽀뽀를 하게 됐다. 그만큼 사랑스럽고 귀하다는 의미다. 함께 30년을 살다보니 지금은 아내가 든든한 동반자이자 친구 같다.”(남편)

“처음에는 남편이 내 일에 관심이 없었다. 서예나 다도 등 자기분야만 팠다. 예술가가 다 그렇거니 하고 이해했다. 그러다 남편이 염색에 관심을 가져주었다. 지금은 남편은 남편대로 차와 염색 서예의 연결고리가 완성되는 단계인 것 같고, 또 남편의 연결고리가 내 작품 안에서 부부애로 되살아나기도 한다.”(아내)

서로의 자랑을 해달라고 하자 부부의 눈이 반짝였다. 다시 태어나도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겠느냐는 질문에 “이 좋은 아내와 남편을 나만 소유하면 욕심”이라며 “다른 사람도 혜택을 보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보다 높은 차원의 무소유의 사랑론을 펼쳐냈다.

“한 가지를 하면 끝까지 하는 끈기가 있다. 한복을 끝까지 해서 250만 중에 5인에 뽑혀 달구벌 명인이 된 것도 끈기 때문이다. 아내가 상 받을 때 가족 대표로 갔는데 고맙고 대견했다. 20대 30대의 아내보다 지금의 아내가 너무 편안하고 좋다.”(남편)

“남편은 생각이 유한 사람이며, 주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을 좋아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 남는게 신기할 정도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늘 자신의 매력을 업그레이드 하려고 노력한다. 항상 나를 편안하게 해주고 구속하지 않고 조용하게 내조해 준다. 서로 깎이고 깎여서 이제는 편안하고 좋은 친구 같다.”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사진=박현수기자 love4evermn@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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