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인아웃] '찬실이는 복도 많지'…찬실이는 영화를 정말로 좋아했는데…
[백정우의 줌인아웃] '찬실이는 복도 많지'…찬실이는 영화를 정말로 좋아했는데…
  • 백정우
  • 승인 2020.05.28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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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영화 PD이다. 아니 PD였다. 찬실이는 올해 나이 마흔 살이 되었고, 미혼이며 혼자 산다. 새 영화 크랭크인을 앞둔 회식자리에서 감독이 급사하면서 실업자가 되었다. 영화로 밥 먹기 힘든 시절에 하필 일이 끊긴 것. 찬실이는 단출하다 못해 비루한 살림살이를 이고지고 하늘 아래 첫 동네로 이사한다. 김초희 감독 장편데뷔작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오프닝이다.

감독 사망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된 영화 PD 찬실이의 다소 엉뚱하고 순진한 분투를 그린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의 위상이 협소해진 당대를 근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며, 영화가 찬란했던 영화광 시대를 향해 쏘아올린 러브레터이다.

한국영화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되는 1990년대. 바야흐로 이 땅에는 새로운 영화와 영화광의 시대가 도래 하고 있었다. 각종 PC통신 영화동호회를 필두로 영화잡지와 인터넷 사이트가 속속 생겨났고, 나름의 색깔과 담론으로 영화광을 끌어들여 시네필(cinephile)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90년대를 자양분 삼은 이들은 영화제작자와 감독과 스태프로, 또 누구는 매체 기자로, 다른 부류는 영화평론가나 학자로 입지를 굳히며 한국영화의 핵심인력이 되었다. 김초희 감독도 그중 하나이다.

90년대를 횡단한 세대가 만든 영화답게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는 영화광을 매혹시킬 거리가 즐비하다. 예컨대 찬실과 김영의 이자카야 장면. 이 장면에서 나는 오즈 야스지로의 ‘꽁치의 맛’을 떠올렸지만, 영화에선 ‘동경 이야기’를 소환하며 찬실의 영화편력을 드러낸다.

심지어 영화는 늦가을에 시작해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끝난다. 찬실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이고, 오즈는 겨울에 영화를 찍지 않았다. 찬실이를 영화판으로 이끈 에밀 쿠스트리차의 ‘집시의 시간’을 이름도 아련한 ‘정은임의 FM영화음악’과 정성일 평론가의 목소리로 되살려낸 감독은, 90년대 영화광의 필수목록인 영화잡지 KINO와 예술영화 비디오테이프 가득한 찬실의 방을 작은 영화도서관으로 만들어버렸다. 한 시대를 풍미한 장국영도 ‘아비정전’에서 맘보춤을 추던 그 모습으로 찬실의 옆방에 기거 중이다.

이쯤 되면 찬실은 90년대 시네필을 거쳐(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고 말한 단편영화감독을 바라보는 찬실의 안타까운 표정은 예술영화에 경도된 시네필의 태도와 꼭 닮았다.) 영화판으로 넘어온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런 찬실이가 영화를 접을 참이다.

찬실이는 영화제작자보다는 시네필에 가깝다. 영화 없이 살 수 있겠냐고 단편영화감독을 추궁하는 목소리가, 영화사의 위대한 감독을 옹호할 때의 표정이 이를 방증한다. 좋아하는 영화는 술술 읊어대지만, 정작 자신이 만든 영화는 입에 올릴 자신이 없다. 영화를 사랑하는 법은 너무 잘 알고 있으되, 영화로 돈 버는 방법을 몰랐던 찬실이다.

예술영화 만드는 감독과 함께한 8년 세월이 밥 한 끼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찬실의 비루한 현실. 설사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지언정, 누군가는 긴 세월 영화를 끌어안고 고군분투한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를 보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우리가 믿고, 하고, 보고 싶은 거.”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90년대 영화광과 자신에게 보내는 감독의 위로이다. 찬실이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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