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턴
유턴
  • 승인 2021.03.29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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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백미러가 보여주는 풍경은 언제나 어제다. 어제도 어제고 오늘도 어제고 내일도 어제일 것이다. 늘 과거 속에서만 산다. 생의 어느 한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유턴을 해볼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백미러 아래 쓰인 글씨가 마음에 들어와 싹을 틔운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해 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에 발목이 묶였다. 어서 빨리 정체가 풀리기를 바랐지만,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집을 두고도 한 시간이 넘도록 도착하지 못하고 있다. 붉은 비상등을 켠 채 노을을 등지고 한참 동안 차 안에서 오도 가지도 못하고 갇혀 있다.
백미러 속으로 노을이 잠긴다. 붉은 노을은 유혹적이다. 멈춰 선 김에 뒤 한 번 돌아보라는 듯 지나쳐 온 길들의 목록들을 펼쳐 보이며 그림자처럼 나를 잡아끈다. 현재와 과거가 백미러 안에서 함께 꽃핀다. 백미러에 물든 노을 속에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이루지 못한 꿈들이 수런댄다. 되돌릴 수도 되돌아갈 수도 없는 어제만을 재방송처럼 보여주면서 깊은 슬픔에 빠져들게 한다. 현재진행 중이면서 또한 과거다.
자가용을 두고 택시를 탄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골목까지 들어오지 않고 큰길에서 내리는 편이지만 그날따라 들어야 할 짐이 많은 데다 비까지 내렸다. 더군다나 어두운 밤, 늦은 저녁이어서 집 앞 골목 안까지 들어와 내려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그러기 위해선 유턴을 해야 한다. 죄송한 마음에 꽃잎 지듯 속삭이는 목소리로 '저기 앞에서 유턴해 주세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기사님은 만개하듯 호탕한 목소리로 오히려 내게 고맙다고 하신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당연히 해 드려야 하는 것을 뭘 그리 죄지은 사람처럼 그러십니까.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더."
차 안의 싸한 공기를 환기하려는 듯 기사님은 택시 운전을 하면서 겪게 되는 손님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턴, 좋지요. 전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유턴하는걸요. 하지만 정작 택시 운전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내 삶의 유턴은 맘대로 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유턴도 잘해야 해요. 해선 안 되는 유턴도 있으니까요."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을 향해 외투를 벗기도 전 대뜸 물었다.
"당신, 이제껏 살아 온 삶 중에 딱 한 번 되돌릴 수 있는 권한을 신이 있어 부여해 준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 혹 결혼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겠째?"
남편이 대답한다. 일초의 머뭇거림도 없이.
"그렇지. 근데 그럴 순 없다. 당신보단 울 예쁜 새끼들을 만날 수 없으니…."
국도와는 달리 고속 도로 위에선 유턴할 수 없다. 톨게이트에 한 번 오르고 나면 이다음 톨게이트가 나올 때까지 되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간혹 잘못 든 길임을 깨닫고 톨게이트를 올리자마자 곧장 회차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그 역시 잠깐 하는 사이에 놓치고 만다. 삶도 마찬가지다. 한 번뿐이다. 죽고 나면 그만인 것이다. 한바탕의 봄 꿈이며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영원할 것 같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결국 무너진다고 하지 않던가.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겨울나무처럼 메말랐던 과거만이 있었던 건 더더욱 아니다. 답답했던 기다림이 있었지만, 불행하다 여기지 않았다. 과거라는 시간을 잘 견뎌왔기에 환하게 꽃피운 오늘의 내가 있을 테니. 오지 않은 내일을 염려하기보다 내 눈앞에 놓인 오늘의 꽃으로 살고 싶다. 지나온 어제를 후회하기보다는 오늘 주어진 시간에 한껏 꽃 피우리라.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잊지 않기로 한다. 당당하게 주위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오래전, 옥상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늙은호박을 생각하며 써 놓았던 '노을을 익히다'라는 제목의 시를 부표처럼 떠 올려 본다.
"암술 담아 올린, 샛노란 꽃잎들/ 공중으로 날개 풀어 헤쳐/ 황홀한 뜻 하나 새겨 두려는 듯/ 걸어온 길 되짚어 본다/ (...)/ 담벼락에 기대 오른 하늘 한 칸/ 곱게 불 타오를 때까지/ 디뎌온 발자국마다 때론,/ 되돌리고 싶은 외마디 줄에 매달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입맛 다셨을 것이다/ (...)/ 온몸으로 하늘을 인 채/ 허공에 띄운 등화燈火가 되어/ 노을을 끌어안고 둥글게 늙어갈/ 붉은 신호,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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