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이 팔공산 부인사서 보름기도 들어간 까닭은…
선덕여왕이 팔공산 부인사서 보름기도 들어간 까닭은…
  • 김종현
  • 승인 2021.04.21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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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12) 달구벌이 열었던 삼한일통
631년, 서라벌 국운 ‘풍전등화’
선덕, 제왕과제 부여받겠다 결심
보름기도 끝 ‘신라천년’ 뇌리 스쳐
저고리에 붉은 실로 새기고 환궁
이후 백제· 고구려 차례로 함락
8년 전쟁 뒤 ‘삼한일통’ 대업 완수
달구벌조시
달구벌조시. 그림=이대영

‘하늘이 행복을 약속하면서 틀어준 보금자리(神皐福地)’였기에 달구벌(닭벌)이라고 했다. 이를 발음하는 사람의 음가차자(音價借字)로 ‘달벌(達伐), 다벌(多伐), 달구벌(達句伐), 달불(達弗)’로 표기하기도 하고, 향찰차자(鄕札借字)로는 ‘달구불(達句火)’라고 표기하기도 했다.

벌(伐,火 혹은 弗)은 벌판, 촌락, 읍성 혹은 시정촌(市井村)을 의미했다. 달구벌이란 명칭은 박제상(朴堤上, AD 363~419)이 저술했다는 ‘부도지(符都誌)’에 의하면 삼한시대부터 남해(낙동강)와 팔공산 기슭이 맞닿은 달구벌(달구벌)에다가 아침신시(朝市)를 열었다(設朝市於達丘)고 기록하고 있다.

631년 4월 초하루 덕만공주(선덕여왕, 출생미상~647년)는 동갑내기 자장율사(慈裝律師)로부터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렸다(一切唯心造)”는 메모쪽지를 받아들었다. “제대로 돌아가는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서라벌 국운(無癌無處,徐羅國運)”을 걱정하는데 대한 처방전이었다.

덕만공주의 머릿속엔 한무제(漢武帝)가 태산봉선(泰山封禪)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곧 바로 제왕과제를 중악(오늘날 팔공산) 봉선에 부여받겠다고 결심을 했다. 닭벌(달구벌)을 보담아 생육시키는 모계중악(母鷄中岳)을 찾아들었고, 부인사(符印寺) 보름기도에 들어갔다. 4월 19일 저녁 예불에 그녀의 뇌리를 스쳤던 “새롭게 천년사직을 펼쳐라(新羅千年)”라는 제왕과제를 잊지 않고자, 저고리 고름에다가 붉은 색실로 “신라천년(新羅千年)”이라고 새겼다. 곧 바로 환궁 길을 독촉했다.

“새롭게 펼치자(新羅: 德業日新,網羅四方)!”라는 일념으로 서라벌로 향하는 길에 i) 천년왕궁의 기둥감으로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을, ii) 천년사업으로 삼한일통을 디자인했다. 곧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그녀의 유지는 이어져 660년 백제와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렸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이 적으로 돌아섰다. 즉 당나라는 신라를 먹어 삼키고자 했다. 그들과 8년간 전쟁 끝에 676년에 겨우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과업을 완수했다.

얼마나 나당결전으로 기진맥진했는지 통일 후에 13년간 치유의 세월을 보내고 보니 하늘에서 내려온 계림국(鷄林國)의 건국이념은 사라지고 향락과 안일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를 직감한 신문왕(神文王)은 689년에 ‘김계상천(金鷄上天)’이란 제2의 신라도약계획을 구상했다. 바로 한반도의 심장인 중악(八公山)의 품안으로 천도(遷都)하겠는 비밀프로젝트였다. 이를 안 서라벌 귀족들은 사생결단으로 반대했고 끝내 결실을 맺지 못했다(王欲移都達句伐未果). 그러나 후유증은 79년 동안 갔다.

757년(景德王16)년에 비로소 경덕왕은 천도는 못하더라도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명분이라도 만들고자 사마천(司馬遷, BC 145~ BC 86)의 사기(史記)에서 진시황(秦始皇) 조상들의 고향이었고, 신라건국시조 김알지(金閼智)의 선인들이 살았던 흉노지방의 지명인 ‘광활하게 펼쳐진 언덕정토(大方廣丘, broadly-developing hill-heaven)’이란 의미인 대구(大丘)를 달구벌에다가 개칭했다. 대방광(大方廣)의 이상을 펼치고자 이름만이라도 봉황 대신 닭(鷄對鳳凰)을 챙겼다.

이를 두고 오늘날은 “삶이나 하는 일에 의미와 철학을 부여해서 새로운 힘을 만든다”는 의미치유(logotherapy)라고 부른다. 당시도 위정대의명분(爲政大義名分)에서 의미치유가 국운을 좌우할 정도였다. 당나라는 하찮게 여겼던 신라(新羅)에게 대패하고부터 회군하는 길이 가시밭길이었다. 나당연합군 사령관 소정방(蘇定方,592~ 667)은 당 황제 고종을 대할 면목도 상실했고, 자신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다.

이때에 눈치 빠른 신하들은 신라 분풀이용 의미치유프로젝트를 상신했다. “삼한반도(三韓半島)를 ‘아침밥상에 오를 생선(朝鮮)’, 신라는 ‘안주상에 오른 까칠한 복숭아(盤桃)’, 고구려를 ‘미친바람이 휘몰아치는 골짜기(風谷)’, 백제는 예식진 장군 등이 자신의 국왕을 사로잡아 투항했기에 ‘동쪽에 해 뜨는 곳(日本)’으로, 왜는 ‘바다물속에서 뽕나무나 붙잡고 살아라(扶桑)’”라는 분풀이작업(解怨作業)을 했다. 이런 의미치유책(logotherapy project)은 극비로 천 년 이상 땅속에 묻혀서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2012년 중국에서 일본(日本)이란 명칭이 당시 백제를 의미했다고, 오늘날 일본은 ‘부상(扶桑)’이라고 했다는 고고학적 자료인 예식진(615~ 672) 묘지명이 무덤 속에서 출토되어 밝혀졌다.

◇닭벌(달구벌)에서 ‘드넓은 언덕(大丘)’으로 개명

물론 중국에선 기원전 2천 년 하(夏)나라의 백익(伯益)이 쓰기 시작해서 BC 4세기까지 보완 저술했다는 ‘산해경(山海經)’에서 삼한반도를 ‘푸른 언덕(靑丘)’라고 했다.

청구는 한때 대구(大丘)를 대신해서 오늘날까지 지명(청구네거리), 학교명(청구대, 청구고등) 등으로 내려왔다. “올망졸망한 푸른 언덕에는 9개의 꼬리를 가진 여우(九尾狐)가 살았으며(有丘之國有狐九尾),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내어 사람들의 혼을 쏙~ 잡아 뺄 정도다”라는 신화가 산해경(山海經)에 기록되어 있다.

달구벌 대구의 지명과 역사가 닭에 연유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현존 지명은 동구 용계동(龍鷄洞),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龍鷄里), 동구 동화사의 봉황루(鳳凰樓)와 봉황문(鳳凰門), 달성군 옥표면 금계산(金鷄山), 대구시내의 달구벌대로(達句伐大路) 등이 있다. 이런 이름들이 명실상부한 실체적 진실을 말하고 있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은 젖먹이 때부터 할머니들이 불러주던 “구~ 구~ 닭아 울지 마라”라는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을 잤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구구탁 예설라”는 바로 신라향찰로 된 자장가였다. “아사라(禮說羅)”라는 말의 뜻은 “조심스럽게 말하라” 혹은 “예의 있게 울어라”라는 해석이 있다.

일연스님은 “구~구~닭은 닭을 말하고, 예설라는 귀중하다는 말이다”라고 설명했다. 또 “신라 사람들은 닭은 신으로 공경하고 닭 깃을 공손히 뽑아서 머리장식으로 달고 다닌다”는 사실까지 덧붙였다.

6세기 당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 李賢, 651~684)의 묘실내부 사신도(使臣圖), 6세기 당염입본왕희도(唐閻立本王會圖)의 직공도(職貢圖), 7세기 중반 우즈베키스탄(Uzbekistan) 사마르칸트(Samarkand)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Afrasiab Painting)에도 신라 사신들은 하나 같이 닭 깃털로 만든 조우관(鳥羽冠)을 쓰고 있었다.

◇달구벌(닭벌)이 치킨의 본향

고고학적으로 닭의 기원을 살펴보면, 현재까지 출토된 닭 가슴뼈(wishbone)는 기원전 2천 년 전으로 소급할 수 있다. 이보다 앞선 건, 인더스 강변의 흙 문양인장(clay stamp)을 보면 기원전 4천 년까지 소급되고 있다. 인장문양은 지혜로운 닭이 감정적으로 난폭하기만 한 호랑이 두 마리의 싸움을 말리고 있는 부조다.

일반적으로 닭(chicken)은 고대 인도에서 BC 5세기까지 서부 아시아 리디아(Lydia)에서 그리스(Greece)로 옮겨졌다. 가금(Fowl)으로 한정해 보자면 이집트에서는 “매일 생명을 주는 새(bird that gives birth every day)”라는 표현이 있다. 가금은 BC 5세기 중엽에 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전파 사육되었다. 당시는 먹거리용 닭이 아니라, 사람 목숨 대신에 희생(代命供犧) 혹은 제전용으로, 간혹 싸움용도로 길렀다. BC 4세기 후반 헬레니즘 시대(Hellenistic period) 이후에 식용으로 사육되었다.

닭(cock)이란 영어단어는 영국의 소설가 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 1343~1400)가 1392년에 쓴 ‘캔터베리의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서 처음 나왔다. 물론 1390년대 초서(G. Chaucer)의 ‘수녀원 신부 이야기(The Nun’s Priest’s Tale)’에서도 “여우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운명을 꿈꾸는 자랑스러운 수탉(a proud cock (rooster) who dreams of his approaching doom in the form of a fox)”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또한 닭싸움(cockfight)이란 단어는 1607년에 닭 훈장(Commendation of Cocks) 혹은 닭싸움(Cock Fighting)이 있었고, 1634년에 윌슨(George Wilson)은 ‘싸움 닭(cock of the game)’을 사용했고, 그리고 1646년에 두 마리의 게임용 닭싸움(gamecock), 투계장(cockpit)이란 말도 있었다.

글 = 권택성 코리아미래연구소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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