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줌 인 아웃] 너무 이른 시간과 영화 ‘시간의 사용’
[백정우의 줌 인 아웃] 너무 이른 시간과 영화 ‘시간의 사용’
  • 백정우
  • 승인 2021.05.13 21:2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 ‘시간의 사용 (L‘emploi du temps)’
영화 ‘시간의 사용 (L‘emploi du temps)’

 

아침 10시경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매달 원고를 보내는 곳의 편집자로부터 걸려온 것인데, 첫 마디는 “선생님, 일어나셨어요? 너무 이른 시간에 전화 드린 건 아니죠?”였다. 물론 아니다. 그 즈음이면 커피를 곁들인 아침을 먹고 소화제도 두 알 삼킨 다음 책상 앞에 앉아 모니터와 마주하며 하루 일과를 깨작거릴 시간이다. 이런 류의 아침 인사, 그러니까 주로 외부로부터 걸려오는 아침 전화인 경우, 조심스레 상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즉 글쟁이들에 대한 편견, 이를테면 글로 밥 먹고사는 사람들이란 새벽까지 통음하거나, 새벽까지 글을 쓰다 잠들어 해가 중천이나 돼야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게 글쟁이들의 습관일 거라고 여기는 까닭이다(무수한 소설과 영화가 그렇게 그려왔으니까). 하기야 나도 봉두난발인 채 세상 가장 게으른 자의 모습으로 슈퍼로 직행하는 날도 있으니, 완전히 부정하진 않겠다만 요즘 세상에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다가는 밥 굶기 십상일 터. 게다가 제 입맛에 맞춰 시간을 사용하다가는 사회부적격인간으로 낙인찍히기 딱 알맞다. 그래, 나 일찌감치 일어나 있다는 얘기다?

지금의 세상을 살아가려면 타인의 시간을 위해 나의 시간을 분할하여 내놓아야 한다. 인정하기 싫어도 부정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작동원리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결국 누군가의 시간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헌납할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 영화, 로랑 캉테(200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더 클래스’를 만든 감독)의 ‘시간의 사용 (L‘emploi du temps)’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이 지점이다.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규칙에 따라 시간의 고용자로 살아가던 평범한 회사원 뱅상이 회사에서 해고된 후에야 비로소 자주적인 시간의 사용자로 변신한다는 얘기는 시사적이다. 인간이 한낱 부품으로 전락한 후기자본주의사회의 단면을 차갑게 관조하는 감독의 시선은 개인이 시간을 맘대로 쓰기 위해선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이른 시간과 너무 늦은 시간이란 각자의 생활패턴에 의해 스스로 정한 규칙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너무 이른 또는 너무 늦은 시간이란 게 없는 건 아니다. 밤 8시 이후에는 추심업체의 빚 독촉이 금지되어 있고, 기업과 공공기관이 시행하는 근무시간 후 카톡 금지도, 단체톡방이나 사적으로 너무 이른 시간 카톡을 보내지 않는다는 암묵적 규약도 같은 맥락이다. 제 아무리 자본주의화 된 시스템이 개인의 시간을 속박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인정한다는 묵시적 약속일 테다.

진짜 권력자는 돈과 시간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돈이야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도 시간만큼은 내 의지대로 관리하며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일 터. 말하자면 사회경제활동 가운데 상호관계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의 의도대로 시간을 조절하며 살고 싶다는 얘기다. 이 정도가 되려면 얼마간의 성공과 경제적 안정이 뒷받침돼줘야 한다. 언감생심 그런 날이 내게 올 리 만무하겠지만, 가끔 걸려온 전화의 상대가 나의 스케줄을 조심스런 어조로 물을 때마다 혼자 피식 웃곤 한다. 나의 시간이 아직은 내 것이구나, 하고 말이다. 오랜 만에 ‘시간의 사용’을 다시 봐야겠다.

백정우ㆍ영화평론가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부로94(신천 3동 283-8)
  • 대표전화 : 053-424-0004
  • 팩스 : 053-426-6644
  • 제호 : 대구신문
  • 등록번호 : 대구 가 00003호 (일간)
  • 등록일 : 1996-09-06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대구, 아00442
  • 발행·편집인 : 김상섭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배수경
  • 대구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대구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icbae@idaegu.co.kr
ND소프트
많이 본 기사
영상뉴스
SNS에서도 대구신문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