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적한 떡갈잎·움푹 패인 돌…‘태초의 밥그릇’
넓적한 떡갈잎·움푹 패인 돌…‘태초의 밥그릇’
  • 김종현
  • 승인 2021.07.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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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음식 세계로> - (23) 밥그릇부터 챙기는 세상
옛날 시골, 조상 분묘가토 후
마을 사람들 모여 다같이 음복
넓적한 떡갈잎 2개 따들고 가
하나는 접시로 하나는 잔으로
밥그릇부터 챙기는 사회적 관습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와
반반한 돌은 음식 담기에 사용
옴폭하게 파인 돌은 다용도
담기는 내용물 생각하지 않고
떡갈잎
태초에 사용된 떡갈잎 접시.
그림 이대영

질솥(土鼎)이나 청동 솥은 춘추전국시대 제전에 사용했던 그릇에서 시작했기에 ‘삼국정립’ 혹은 ‘파부침주’처럼 정치군사적 의미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각종 먹거리나 그릇과 같은 도구를 생산하기 위해서 흙구덩이(불구덩이) 가마를 이용했다. 가마(窯)의 설문해자(說文解字)의 풀이를 보면, ‘불구덩이(穴)에 먹거리인 어린 양고기(羊)을 넣고 불을 때는 모양을 형상’했다. 필요에 따라 어린양 고기(먹거리) 대신에 기와, 질그릇, 도자기 등의 성형물을 넣고 구워내었다.

한편 그릇을 굽는 가마(窯)의 기원은 BC 2000년 경 이집트 고대국왕 무덤의 내부벽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릇을 소성하는 원통형 모습이 그려져 있다. BC 600년경 아시리아에선 ‘움집 가마’혹은‘땅 굴 가마(kiln)’를 만들어 중동, 유럽 및 아시아에 전파되었으며, 중국의 가마 굽기 기술이 한반도를 거쳐 AD 400년대에 일본에 전해졌다.

우리나라의 가마솥은 삼국사기 AD 22년 고구려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편에 나온다. ‘대무신왕 4년 12월 동계에 부여를 정벌하려 비류수(沸流水)에 도착하니 물 섶에 한 여인이 솥에 뭔가를 하고 있어 가보니 가마솥만 놓고 도망을 가기에 불러서 밥을 하게 했더니 기다리지 않게 금방 밥이 되었고, 군사가 배불리 먹었기에 그 남편에게 솥을 짊어졌다는 의미인 ‘부정(負鼎)’이란 성씨를 내렸다.”고 적고 있다. 당시는 토기로 만들었던 질솥(土鼎, earthenware kettle)이었으나 처음으로 쇠솥(釜, iron pot)을 경험했다는 기록이다.

과거 6·25전쟁 이후 시골에서 물고기, 가재, 개구리 등을 잡으면 익모초, 쑥, 계피 잎 등으로 싸고 진흙을 발라서 모닥불 위에다가 놓고 구웠다. 어느 정도 지난 뒤에 진흙은 털어내고, 나뭇잎 껍데기를 벗겨 물고기를 먹었다. 계란 껍데기에다가 쌀과 물을 넣고 잔불에 밥도 해먹었다. 이렇게 가마솥, 냄비와 같은 요리도구도 없이 맛있는 음식을 해 먹었다. 중국고전 예기(禮記)에서는 주나라 팔진미(八珍味)로 기장밥에 젓갈 순모(淳母), 쌀밥에 젓갈인 순오(淳熬), 통 암양 구이 포장, 통 돼지 구이 포돈, 육회 도진, 육포 오(熬), 쇠고기절임 지(漬), 개간과 창자기름 구이 간료 등을 꼽고 있다. 그 가운데 포장이란 어린 암양을 통째로 익모초 등 약초에 싸서 황토(진흙)를 발라 굽었다는 뜻이다.

◇밥보다 먼저 밥그릇부터 챙기는 세상

옛날 시골, 춘궁기에 한식(寒食) 절후를 즈음해 조상의 분묘가토(墳墓加土)를 하는데, i) 먼저 산신령에게 예의를 차리기 위해 가토작업을 고하는 산신제(山神祭)를 지낸다. ii) 다음으로 가토작업을 끝내고 살아있는 수호신인 동네사람들에게 부탁하는 의미에서 마련한 음식으로 음복(飮福)을 한다. 시야에 있는 나무꾼이고 농사꾼이고, 어른이든 아이든 모두에게 음복을 나눠준다. 이때 얻어먹으려 가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준비해온 그릇이 없다는 걸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희망을 담아서 넓적한 떡갈잎 2개를 따들고 간다. 한 개는 접시(豆, dish)로 마른 음식인 떡, 해산물, 과일 등을 받아서 옆에 놓았다가 집에 갖고 간다. 다른 하나는 잔(杯, cup)으로 차(茶), 술(酒), 단술(甘酒) 혹은 식혜(醯) 등을 받아 그 자리에서 다 마신다. 이때에 가장 먼저 자기몫을 받기 위해 떡갈잎부터 챙겨야 했다. 특히 참나무 갈잎보다 큰 떡을 받을 수 있고 넓적하고 나지막하게 자라 어린아이도 챙길 수 있는 갈잎이 떡갈잎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밥그릇 챙기기를 해왔다.

시골에서 산나물이나 나무를 하다가 갈증을 느끼면 개울이나 옹달샘을 찾아서 칡잎(葛葉), 망개(土茯笭) 잎, 자작나무 잎 등을 오목하게 접어 물잔(water cup)으로 사용했다. 요사이도 술꾼들은 술잔을 챙기지 못하면 개울가에서 풀잎술잔, 해변에선 조개껍데기 술잔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애교수준이다. 주사(酒邪)가 심하면 재떨이 술잔, 고무신 술잔에서 콘돔 술잔까지 등장한다.

옛날에도 해골물잔(骸盃)이란 이야기로 원효대사(元曉, 617~686, 본명 薛思)의 구법사례를 든다. 즉 650년 의상(義湘)과 당나라 구법을 떠났으나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661년에 또다시 의상과 당나라로 떠났던 원효는 당항성(黨項城)의 고분 옆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중에 갈증이 나서 주변을 더듬어 찾아보았다. 마침 옆에 고인 물이 있어 아무 맛있게 마시고 해갈했다. 그 뒤 아주 편안히 잠을 푹 잤다. 날이 밝아 저녁에 마셨던 물이 해골바가지(骸匏)에 고였던 것임을 알았다. 그런 일을 통해 “진리가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道不遠人)”를 깨달았다. 곧 바로 신라로 귀국하는 그는 시경(詩經)에 있는 “도끼자루를 제공하기에 도끼가 나무를 베게 되는 것처럼 도란 스스로 멀게 한다(伐柯伐柯, 其則不遠).”는 사실을 각성했다. “누군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아 만들겠노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라는 노래를 지어 온 서라벌 동네방네 퍼뜨렸다.

해외로 눈을 돌리면, 캄보디아엔 관광객에게 ‘나뭇잎 접시(Patravali)’로 가두음식을 팔고 있다. 베트남에서도 ‘바나나 잎 접시’가 보기보다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인도에서는 나뭇잎 접시가 다양하게 여러 지역에 사용되고 있어 이름만 해도 파트라발리(Patravali), 파탈(Pattal), 비스타르라쿠(Vistaraku), 비스타르(Vistar), 혹은 카알리(Khali) 등 명칭도 다양하다. 중국에서도 사용하고 있는 ‘수이에빤(樹葉板)’은 나뭇잎을 도자기 혹은 목제로 만든 것인데 일본식당에서도 이용한다. 일본에서는 ‘하나노사라(葉の皿, はのサラ)’라고 하는데 초밥(壽司)을 담아 줄 때에 많이 사용한다. 최근에는 ‘친환경 음식(environment-friendly food)’을 위해서 나뭇잎 접시(leaf dish)를 사용하기도 한다.

◇왜, 돌밥그릇부터 생겼나?

인류 최초 밥그릇은 물이나 음식을 담기에 좋은 반반한 돌을 사용했다. 옴폭하게 파이고 작은 돌은 다용도로 사용했다. 옛날 시골에서 강아지 혹은 송아지를 사오면 밥그릇이 없기에 옴폭하게 파인 돌을 주어다가 그 위에다가 주거나, 깨어진 항아리 혹은 단지 등을 땅에 묻어놓고 준다. 운이 좋으면 나무통 죽통을 마련한다. 담기는 내용물을 생각하지 않고, 그릇부터 만들었다가 용도별로 사용했다. 그래서 지금도 밥그릇부터 챙기는 사회적 관습이 많다. 할 일에 맞춰가면서 조직을 만들지 않고, 미리 앉을 사람을 위해서 조직을 마련하는 위인설관(爲人設官), 조직은 줄어드는 법이 없고 하는 일과는 무관하게 늘어만 나는 파킨슨의 법칙(Parkinson‘s law)이 생겨났다.

고고학에서도 BC 2600년부터 BC 1960년까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왕들의 석관, 신에 바치는 각종공물은 화강암 돌그릇이었고, 화장품 용기는 섬세하게 조각된 대리석 돌그릇이었다. 인더스 계곡문화( Indus Valley Culture, BC 3300~ BC 1700)의 성숙기(Mature Period)였던 BC 2600년부터 BC 1900년까지 돌 팔찌(stoneware bangles)와 돌그릇이 대량 출토되었다. 베니하산(Beni Hassan) 바위산에 조성된 39기 집단묘지가 있는데 제3호 왕릉 크눔호텝 2세(Khnumhotep II, BC 1918~ BC 1884)의 묘실벽화(墓室壁畵)에 토기(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그려져 있다.

고대 이집트의 ‘토(도)기(pottery)’에 해당한 상형문자(hieroglyph)와 중국한자 ‘그릇 기(器)’자 상형문자가 참으로 유사하다. 고대이집트 상형문자는 가운데 사람(person)이고 세 개의 흙무더기와 오른쪽 아래엔 항아리를 그렸고, 중국한자는 4 개의 4각형의 그릇을 두고 가운데 개(dog)가 지키고 있는 모습이다. 고대 이집트에선 사람(人)이 그릇을 지키는 모습이라면, 고대중국은 그릇 4개를 가운데 개(犬)가 지키고 있는 걸 형상화(皿也, 象器之口, 犬所以守)했다. 이를 달리 해석하는 사람도 있어, 즉 제사상(祭祀床)에 개를 삶아 가운데에 놓고 사방에 제물을 차려놓은 형상(烹犬在中, 配四方物)이라고. 오늘날 밥그릇을 식기(食器)라고 하나, 설문해자에서는 밥그릇(食皿)을 명(皿)이라고 했으며, 옛날에는 제기(祭器)라고 했다. 밥그릇(飯器)에는 일반적으로 질그릇, 주발, 바리(盂), 나무밥그릇(椀), 돌밥그릇(碗) 등으로 구분된다. 1980년에는 중국에선 철밥통(鐵飯碗)이라는 시대적 풍자용어가 생겨났고, 우리나라에서도 공무원 철밥통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편,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선 ‘비어있는 틈새(空間)’을 이용하기 위해서 ‘흙을 섞어 토기를 만듦’이라고 했다. 논어(論語) 가운데 ‘도공들이 일을 잘 하려면 반드시 그 연장을 날카롭게 잘 만들어야 함(工欲善其事, 必先利其器)’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릇 기(器)자는 절구, 흙손, 나무칼, 물레 등의 각종연장(tool)을 말했다. 한편 주역(周易)에서 ‘형이상학적인 걸 도(道)라고 하며, 형이하학적인 걸 형태(器, shape)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고 할때 그릇 기(器)자는 물건의 형상이다. 또한 제기(祭器) 혹은 명기(明器, 무덤 속에 넣은 작은 상징적 그릇)로 사용하는 토기에 개(犬)는 정화용 혹은 속죄용 희생(atoning sacrifice)을 의미했다.

글·그림 = 이대영<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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