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구벌아침] 모란 꽃대에 맺은 초란같이
[달구벌아침] 모란 꽃대에 맺은 초란같이
  • 승인 2022.06.19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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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숙 시인
객지에 나가 있는 아이의 꿈이라도 꾸는 날이면 나는 언제나 서랍 속 깊이 넣어둔 편지를 꺼내 든다. 살아생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지면 '한밤 자고 나서 말해 줄게. 하룻밤만 기다려.'라던 아버지 말과 함께. 하도 읽고 읽어서 닳고 닳은 손때 묻은 아들의 편지를 그때 그날의 일기와 엮어 새끼 꼬듯 떠 올려 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만남 그 자체보다 오히려 기다리는 순간들이 더 긴장되고 흥분이 된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만 늦어도 혹시 안 오거나 못 오는 것은 아닐까, 사고가 난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면서 두리번거리게 된다. 부모라는 이유로 가끔, 자식에 대한 주체할 길 없고 대책 없는 사랑과 연민 때문에 마음이 아려 올 때가 있다.
불과 며칠의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아들을 만나고 돌아온 시간이 까마득하게 멀어진 느낌이다. 하룻밤이라도 자고 왔다면 아쉬움이 덜했을까. 대구에서 강원도 홍천까지 네다섯 시간을 달려갔다가 겨우 여섯 시간을 찰나처럼 보고 온 느낌이다. 첫 면회라 그런지 그리움이 삭아 들지 못한 채 여전히 내 맘속을 맴돌고 있다. 전화도 못 하는데······. 오늘도 나는 대문 앞 우체통을 넘나들며 서성거리고 있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고 벨이 울린다. 드디어 내 오랜 기다림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듯 편지가 왔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 조심스레 '군사우편'이라 적혀진 봉투를 펼쳐 든다.
-엄마, 아빠, 누나 모두 집까지 안전하게 잘 들어갔겠지요. 주어진 여섯 시간, 나 하나 보겠다고 새벽부터 준비하고 오느라 엄청 피곤하고 힘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먼 곳까지 와줘서 무지 고맙고 행복했어. 더군다나 지금 쓰는 이 편지지, 봉투, 그리고 볼펜까지 챙겨주고 가서 군 생활을 하는 데 꽤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
면회 마치고 훈련소를 떠나 지금은 홍천에 있는 야전 수송사령부에 도착했어. 이병을 달고 이곳으로 온 거라 조교 통제는 조금 느슨해졌지만, PX 이용이랑 텔레비전 시청 그리고 전화는 당분간 사용할 수 없어. 일정 기간이 지나면 어쨌든 편해질 거로 생각해.
아, 필요한 건 그때 말한 그대로야 책이랑 비누랑 사진 정도. 이 편지 도착할 즈음이면 누나는 시험 잘 쳤으리라 믿어. 그리고 아빠, 엄마에게 군대 이야기 너무 많이 하진 마. 엄마가 아빠 얘기만 듣고 군 생활이 힘들 꺼라 앞서 생각하며 걱정하는 거 싫어. 면회하러 와서 자꾸 우는 모습 보이니 맘도 아프고. 나는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항상 좋은 쪽으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예전의 군대와는 많이 달라졌으니까 아들을 믿고 파이팅 해줘. 엄마, 이 편지 받고 읽으면서 또 우는 건 아니겠지? 가족 모두 건강하게 웃으며 잘 지냈으면 좋겠어.
엄마, 여기 야수교는 면회하러 오면 외박할 수 있고, 수료식 때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얘기가 있긴 해. 시험을 쳐봐야 알겠지만, 소형이 걸리면 일주일, 중대형은 오 주간이나 있어야 자대로 배치가 돼. 나는 소형이 되면 하고 바라긴 하지만 어찌 될는지. 어쨌든 담엔 엄마가 안 왔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시월쯤, 자대 배치받고 휴가 나가면 그때 많이 볼 수 있으니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엄마, 여긴 깊은 산골이라 멀고 위험해. 혹시나, 엄마 혼자서 오겠단 그런 편지는 하지 마. 지금은, 아들하고 처음 떨어져 있다 보니 많이 보고 싶겠지만, 자대배치 받으면 자주 휴가를 나갈 수 있을 거야. 바깥의 시간은 이곳보단 무지하게 빠르게 흐를 테니 금세 나를 볼 수 있을 거야.
여기 들어오기 전, 보고 싶었던 책을 사 들고 와서 다행이야. 책을 읽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는 것 같아 좋아. 그래서인지 사흘 만에 다 읽어 버렸어. 처음부터 차근차근 줄을 쳐 가면서 다시 한번 정독 중이야. 편지를 쓰다 보니 자꾸 했던 말을 하게 되고 그러네. 벌써 잠잘 시간이야. 무엇보다 엄마, 아빠는 이 아들이 잘 지낸다는 안부를 젤 중요하게 듣고 싶겠지? 우리 가족 모두 파이팅! 하고 마지막으로, 면회하러 왔을 때 만화 보고 핸드폰만 만져서 미안해. 사실은 너무 많이 보고 싶었었어. 또 쓸게. 엄마~사랑해♡-
아들은 그 후, 사단의 운전병을 배차관리 하는 행정병으로 소위 말하는 '꿀 보직'에 배치되어 복무 중이다. 그리우면 언제든 전화를 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자신의 길을 스스로 힘으로 당차게 개척해 나가는 아들의 어깨 위로 큰절이라도 한번 해주고 싶다.
"너를 사랑한다."
이 말을 꼭 한 번 네게 말하고 싶었다. 모란 꽃대에 맺은 초란 같은 꽃망울이 곧 피어날 것이다. 아들아! 네 삶이 그렇게 봄 모란꽃과 같이 화사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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