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
[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
  • 승인 2023.04.17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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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전한(前漢,기원전206∼기원후8)의 고조 유방을 도운 장량(장자방)을 자처했던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1342∼1398)은 1342년(충혜왕 복위 3)음 8월 28일인 임오년 기유월 정묘일 경북 영주(혹은 단양)에서 아버지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영천 우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삼봉가문은 지역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직을 세습하는 집안이었으나 정운경이 급제하면서 가문에서 처음으로 중앙 정부의 정식 관리가 배출되었다.
어머니는 영주의 선비 집안 출신으로 산원 벼슬을 지낸 우연(禹淵)의 딸이고, 정도전의 형제는 모두 셋으로 둘째는 정도존(鄭道存), 셋째는 정도복(鄭道復)이다. 삼봉의 형제들의 작명이 '도(道)'를 전하고[傳] 보존하고[存] 회복시키기[復]를 바란다는 뜻을 자식들의 이름에 반영한 것으로 보아 부친은 학문에 밝은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신유술의 가을 ②정화(丁火)일간은 火기운이 물러나는 시기에 있어 정화 일간이 유약해지므로 오로지 갑목(甲木) 정인(正印)을 사용한다. 백로가 지난 유월 정화는 갑목 정인과 병화(丙火) 겁재와 경금(庚金) 정재를 모두 사용한다. 신월과 유월 정화는 갑목이 없으면 을목(乙木)도 사용할 수 있는데 이 경우 메마른 풀로 불을 밝히듯 말려줄 병화가 필요하다.

삼봉의 사주에서 ④오화(午火) 비견(比肩)의 12운성의 건록은 이 사주에서 독립심과 장남의 책임감을 나타낸다, 자수성가형의 인물들이 많고, 건록성이 있으면 장남이거나 장남의 역할을 계승하는 면이 많다. 건록은 조직의 책임자이자 공익임무에 충실한 정관성(正官星)을 칭하기도 한다.

년간의 ⑤임수(壬水)정관(正官)은 집안에서는 자녀에 해당한다. 정도전은 찬성 최습의 딸인 경주 최씨와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았다. 장남인 정진(鄭津)은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죽지 않고, 이후 형조판서까지 지냈다. 정진은 정내(鄭來)와 정속(鄭束)을 낳았는데, 2남인 정속의 장남이 정문형(鄭文炯,1427 ~ 1501)으로 우의정을 지냈다.

정도전의 2남인 정영(鄭泳)과 3남인 정유(鄭游)는 각각 소윤(少尹)과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였는데, 둘 다 왕자의 난 때 살해당하였다.

정도전의 사주의 유금의 편재격은 소유의 개념보다는 공유의 개념이 강하고 글로벌적이다. 근본적으로 ⑤임수(壬水) 정관(正官)과 ⑥기토(己土) 식신(食神)의 상신(相神)이 존재하면 편재격이 성격된다, 이 사주의 아쉬운 점은 월과 생일이 묘유충(卯酉沖)으로 유금이 파손된 점이다, 삼봉은 1362년(공민왕 11) 임인년(壬寅年) 정관운과 정인운에 과거에 합격하여 정몽주, 이숭인, 이존오, 김구용, 박상충 등과 교유관계를 넓혔다. 그러나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1375년(우왕1년) 을묘년에 그의 운명이 계축대운의 편관대운시기에 이인임과 경복흥의 권신들에 의해 나주로 귀양가서 그후 약 10년간은 관료생활을 하지 못했다. 그가 이성계와의 역사적인 만남은 1383년(우왕 9) 계해년과 1384년 갑자년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 가면서 이루어졌다. 둘의 만남은 역성혁명을 위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며, 정도전 개인적으로는 오랜 유랑의 종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과 이성계와의 인연은 1398년까지 15년간 유지되면서 그의 왕조의 설계자로서의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1389년 정도전은 조준, 정몽주, 설장수등과 주도하여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이후 조준과 정도전의 과전법 개혁과정에서 이색,정몽주 하륜 등과 갈라서고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살해됨으로써 1392년(임신년) 7월 17일 정도전,조준,배극렴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가 개창되었다.

정도전의 천운이 40대 이후 갑인(甲寅)대운의 정인(正寅)대운의 10년간은 정화의 존신인 갑목이 건록지에 않은 최고의 전성기였다. 개국 직후 정도전은 국가 주요 정책의 결정, 관료 인사, 재정 , 군사, 문한 등 국가 경영의 핵심적인 실권을 한 손에 장악하였다. 그리고 새 나라를 위한 기틀을 다지는 일에 7년간 매진하였다. 하지만 사병 혁파나 재상중심의 정치구상,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인 방석세자 책봉 등에서 번번이 이방원과 갈등을 빚은 바, 1398년(태조 7)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으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남은과 함계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조선의 설계자의자 혁명가 정도전은 1865년(고종 2년) 경복궁 재건과 함께 470여 년만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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