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일제강점기의 이승만의 삶의 괘적
[류동학의 세상읽기] 인문명리로 본 일제강점기의 이승만의 삶의 괘적
  • 승인 2023.10.16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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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혜명학술원 원장

이승만의 근본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격국(格局)은 묘월의 정해일주의 투출편인격이다. 묘목(卯木, 토끼)은 절기로는 동면하던 개구리가 대지위로 나온다는 경칩(驚蟄)과 낮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春分)을 포함하는 음력2월을 말한다. 묘목(卯木, 토끼)은 유실수나 곡식과 같은 농작물에 비유된다. 또한 기획, 설계, 교육기관,디자인, 종이, 등을 상징하니 그가 철학박사학위를 받은 바탕이 된다. 학문과 종교와 외국의 인연이 깊고 아이디어가 좋고 기획과 편집기능이 좋으며 약삭빠를 정도로 시대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성향이 편인의 특징이다. 또한 편집능력과 허점파악과 순발력이 탁월한 능력이 편인이다.

36세이후부터 10년(1910∼1919)간 그의 천기는 을해(乙亥)의 편인(주로 은둔과 종교 및 학술활동)과 정관(명예욕과 권력)대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는 조선총독인 데라우치의 헌병경찰의 무단통치기에 해당한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은 후 그는 10월10일 귀국한다. 그는 1912년 3월 26일 다시 미국으로 떠날때까지 주로 기독교활동과 교육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유명한 105인사건(신민회 사건)이 발생하여 미국인 선교사등과 양기탁, 이승훈 등이 체포되었으나 이승만은 무사하였다. 이승만은 계축년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한다.

그는 여기에서 1914년 대조선국민군단을 만든 무장투쟁론자이자 한성감옥에서 의형제였던 박용만(1881∼1928)과 대한인국민회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다. 1913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한다. 안창호, 박용만과 이승만의 갈등과 암투 관계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의 하와이와 미국내 한인 교포 집단을 세 집단으로 쪼개 버렸다. 정관과 편관의 권력투쟁이 강한 이승만은 주도권을 잡았다. 그는 이 시기에 위임통치론을 주장하여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지사들로부터 많은 지탄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회를 열었다. 서재필, 이승만, 임병직,유일한,조병옥등 150여 명이 참석했다. 이후 45세의 이승만은 3.1운동이후 한성임시정부, 노령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임시정부에서 각각 수반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미국과의 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이후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연통제와 교통국의 비밀조직을 임시정부 산하에 두었으나 1920년 말에 발각되어 국내 비밀조직이 파괴되고 말았다.

46세부터 10년(1920∼1929)간 그의 천기는 갑술(甲戌)대운의 정인과 상관대운으로 접어들었다. 상관운은 조직의 파열음과 저항을 동반하고 분열을 야기하는 십성이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통치의 일환인 사이토 총독의 문화통치기였다. 임시정부의 대통령인 이승만의'외교독립론'은 그 당시 대세였던 무장독립전쟁론자들의 비판으로 임시정부는 분열이 심했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단, 대한광복군, 의열단, 신흥무관학교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여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920 10월의 청산리대첩을 이끌었다.

이승만은 결국 1925년 을축년 편인운에 임시정부 의정원의 탄핵결의로 면직되었다. 그는 그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12년간 재직하다가 4,19 민주혁명에 의해 다시 물러나는 헌정사의 불행의 씨앗을 남기고 말았다. 이후 임시정부는 박은식이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국무령 중심의 의원내각제로 개편한다.

56세이후부터 10년(1930∼1939)은 계유(癸酉)대운으로 편관운(공직과 보직을 말함)과 편재운(이성운을 말함)이다. 이 시기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만주국을 세웠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난징학살을 자행하던 시기로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했다. 1931년 김구의 한인애국단원인 이봉창의 도쿄 척살시도와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이동녕은 1933년 계유년 이승만을 국무위원(총 9명)으로 임명했다. 탄핵 후 8년 만의 복귀였다. 60세인 갑술년 갑술월인 1934년 10월 8일에 오스트리아의 프란체스카 도너(1900년생)와 결혼하였다.

66세이후부터 10년(1940∼1949)은 임신(壬申)대운의 정관운과 정재운으로 이승만에게는대길할 운이었다. 이 시기는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가 충칭에 있었고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과 일본이 갈등 국면이 되던 시기였다. 1941년 신사년(辛巳年)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주 워싱턴의 전권대사로 그의 장기인 국제감각의 외교력이 다시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1941년 7월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일본내막기』를 출간하여 12월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진주만 공격 이후 이 책을 통해 조선이 왜 독립해야하는 당위성을 미국사회에 알릴 수 있었다. 1942년 임오년 정관운에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을 시작하여 그는 임시정부의 승인운동을 광복까지 전개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승인과 참전국의 지위획득은 실패하였다. 그는 1942년에 정계인사들로 한미협회와 종교계인사들로 기독교인친한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해방의 기쁨을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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