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의 한숨
안도의 한숨
  • 승인 2012.12.2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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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태 영
대구경북알콘연구소장
“죽령은 길이 좋지 않아 조령을 통해 올라가려고 예천까지 왔지만, 더는 갈 수가 없어서 또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고 이곳에서 임금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만약 윤허를 받지 못한다면 다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릴 작정이고, 서울에는 올라가지 못할 형편이다.

나는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의 사직은 윤허를 받았지만, 정2품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는 그대로 유지되어서 또 지중추부사(地中樞府事)에 임명되었다. 이 모두 지극히 미안한 일이라서 곧바로 사직을 청하고 싶었지만, 다시 임금님을 번거롭게 할 수 없어서 아직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

내가 거듭된 임금님의 부름을 받고도 서울로 올라가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많으니 지극히 두렵다. 그렇다고 이 때문에 무턱대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오래도록 사직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편치 않아서 부득이 또다시 지중추부사의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내 거취 문제는 지금의 여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정상 매번 사직하기도 어려운 형편이다.

지금 새 임금님이 왕위를 계승하시고 명나라 사신들도 돌아가서 사람들이 기뻐하니, 불행 중에도 크나큰 다행이라고 하겠다. 다만, 나는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는 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어서 무척 걱정이다. 나는 서울에 올라갔다가 국상을 당해 닥친 많은 일로 다른 관리들과 함께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과로로 건강을 몹시 해쳐 아주 크게 병이 났었다. 이러한 처지로는 지중추부사와 같은 한직에도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예조판서에 임명되어 하루도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교체된 것이다. 나라의 은혜를 저버림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도리상 하는 일 없이 봉급만 받아먹으면서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속히 고향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병이 중해서 예조판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새 임금님의 은총을 저버린 것이 부끄러웠지만, 하는 일없이 봉급만 받아먹을 수 없었다. 또 추위가 닥치는데 객지에서 죽게 될까 몹시 두려워, 너무나 급박해서 곧바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번 일 때문에 비방이 그치지 않아 처벌을 기다리고 있던 중에, 뜻밖에 또다시 임금님의 부르시는 명령을 받게 되니, 두렵고 놀라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래서 부득이 또 부르시는 명령을 거두어줄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만, 이 일로 인해 다시 시끄러운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몹시 두렵고 걱정된다.

전시(殿試)가 끝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가 없구나. 이곳 사람들은 모두 낙방한 것이냐?” <『안도에게 보낸다』, 퇴계이황:정석태 옮김>에서

몇 차례의 대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낙후되는 지역상황에 대한 전환점을 마련해 볼 요량으로 퇴계 선생이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 글을 골라골라 인용해 보았다. 먼저 18대 대통령선거 똘똘말이 진보(進保-진보와 보수) 대전에서 2% 넉넉히 진땀승을 차지한 영남 남인들의 후손들에게 박수와 함께 축하를 보낸다.

영남 남인은 1689년 원자정호(元子定號) 문제로 숙종의 환심을 사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 이래 100년이 넘도록 정승에 기용되지 못하는 등 노론의 견제를 당해 대한제국에 이르러 부분적으로 해소되기 전까지 지역차별을 당했다. 중앙정계 진출을 제약당했던 영남 남인의 한을 풀어준 계기는 비극적이게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였다. 비록 중앙권력을 차지했지만 정통성 결여라는 멍에는 쉽게 지어지지 않았다. 무질서와 사회혼란을 빌미로 총을 들고 일어섰던 박정권이 2012년 ‘경제 민주화’, ‘민생대통령’을 전면에 내걸고 12·19선거를 통해 재집권함으로써, 대구경북 시도민의 한과 멍에를 동시에 날려버리는 대선 환타지를 쓰는데 성공했다.

중앙권력에 대한 콤플렉스가 날아갈 만큼 잡아보았으니, 이젠 지하상가 하나 번듯하게 순개발하지 못하고 초중등생 무상급식까지 후순위로 미뤄가면서 미래성장동력을 갉아먹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버젓이 벌어지는 ‘남넋땅’이 되지 않도록 하자. 중앙진출은 지역회귀로! 대구경북의 오래된 지역발전 모델은 향촌으로 하방해 인재들의 숲인 사림을 경상좌우도에서 전라, 충청, 경기까지 아울렀던 퇴계전통에 있었다.

임금의 부름을 일흔 아홉 번 뿌리치고 손자에게 편지 쓰는 자상한 할아버지 선생으로 살다간 퇴계의 처세가 청량한 팔공산 미륵불처럼 큰 바위처럼 내려앉는다. 퇴계리더십의 부활과 복원으로 대구경북이 거듭나기를 바래본다. 그렇게 변화될 계기를 마련했으려니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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