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봄등 뒤에서 누가 오는 소리 들려 돌아보니
구겨진 채 굴러다니는 종이 한 장이다
종이는
사람 발소리를 내며
제 마음으로 떠돌아다닌다
변덕스런 바람에 펄쩍 뛰기도 하고
낙엽 구르는 소리로 구르기도 하다가
잠잠히 서 있기도 하다가
어느 곳에 가서 조용히 멈추는데
아! 거기,
눈부시게 매화가 피어 있었다
언젠가 연인에게 썼던 서신 한 장
사연은 풍화되고 구겨진 몸만 데리고 와서
아직 꽃 핀 줄 모르는 내게
꽃피었다 전해 주고 저만치 굴러간다
◇이해리= 경북 칠곡 출생. 1998년 사람의 문학 등단. 2003년 박경리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수상, 2020년 대구문학제 대구문학상 수상. 시집 ‘수성못(2020 학이사)’ 외 4권이 있음.
<해설> 등 뒤에서 누가 다가오는 소리를 시인이 들었다. 봄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종이가, 사람 발소리를 내는 종이라고 시인의 생각은 점층적인 변신을 시작한다. 그 다음엔 종이는 종이가 아니라 봄이고 싶은 그 무엇이 된다고 시인은 상상한다. 그런 종이가 결국엔 멈추게 되는데, 어라! 매화가 핀다. 어느 과거 연인에게 썼던 서신 한 장이 사연은 풍화되었어도 어여쁘게 “구겨진 몸”으로 와서 계절에도 무감각해진 시인의 귀에 바스락바스락 꽃피었다는 소식을 알려주고 간다는 것. 이 모든 게 종이의 힘인 걸, 시인은 자상하게 알려주고 있다.
-박윤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