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조선 선비들, 기질적인 유림 관행서 와유문화 안착
[금호강 르네상스 시원을 찾아서] 조선 선비들, 기질적인 유림 관행서 와유문화 안착
  • 김종현
  • 승인 2023.05.1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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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와유를 통한 대자연의 소요유
소요유란 자유롭게 노닐다 간다는 것
삶이란 자신의 여하한 틀에서 벗어나
절대적 자유 누려야 생각 지향점 밝혀져
대자연의 체험을 통해 호연지기 도야
요산요수 풍류 맛보고자 서원 등 마련
낙동강 수변 선유·와유문화 자리 잡아
아시골뱃놀이
아시골 뱃놀이(야주).

◇선유의 종류

조선 선비들의 선유(뱃놀이)는 i) 방법에 따라 일정한 지점에 머무는 체류선유(滯留船遊)와 유람선유(遊覽船遊)가 있다. ii) 성격에 따라 관료의 접대나 기념행사를 위한 행사선유(行事船遊)와 행락선유(行樂船遊)가 있다. 즉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선유도처럼 유유자적하는 와유선유(臥遊船遊)와 혜원 신윤복의 ‘주유청강(舟遊淸江)’과 같은 행락선유가 있다. iii) 모임에 따라 계회선유(契會船遊), 동문선유(同門船遊), 동지선유(同志船遊) 혹은 회맹선유(會盟船遊)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평양감사향연도(平壤監司饗宴圖)’혹은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등은 계회선유다. 허주부군산수유첩은 유람선유에 속하며, 평양감사향연도 중 화려한 잔치풍속을 여실히 그린 ‘월하선유도(月下船遊圖)’는 행사선유다. 평양감사향연도 작품집은 3연작으로 ‘월하선유도(月下船遊圖)’, ‘부벽루연회도(浮碧樓宴會圖)’와 ‘연광정연회도(練光亭宴會圖)’가 있다. 크기는 196.9㎝로 일반적으로 봐선 대작이다. 특히 부벽루연회도 아래 단원 김홍도의 서명과 낙관이 찍혀있다. 그림에 선유란 말만 들어도 “젓대 소리는 늦바람으로 들을 순 없어도. 백구만 물결 좇아 날아든다네(一笛晩風聽不得, 白鷗飛下浪花前)”라는 시 구절이 머리에 떠오른다.

특히 상주(尙州)를 중심으로 한 낙강범주시회(洛江泛舟詩會)는 고려 때 백운 이규보(李奎報, 1168~1241)로부터 즉 1196년에 시작해 1894년까지 698년간 51회의 상주낙동선유모임(詩會)을 했다. 1607년부터 1778년까지 171년간 51회의 낙강선유창작(洛江船遊創作) 모임을 기록으로 ‘임술범월록(壬戌泛月錄)’이라는 시문집을 남겼다. 이 시첩에는 1607(선조40)년 상주 목사 김정목, 조익, 이준, 전식의 선유시회, 1622(광해군14)년 음력 7월 16일부터 2일간 조정, 이전, 이준, 강응철, 김혜, 류진, 전식 등 상주 선비 25명의 범주시회, 1778(정조2)년까지 지역 선비들의 낙강시회 때에 읊었던 시가를 모아 편집했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고자 2002년 상주시는 ‘낙강시제문학축제’라는 이름으로 문화행사를 기획·추진해 왔다.

◇선비란 참다운 소요유(逍遙遊)하는 사람

삶이란 절대자유를 지향하면서 산다는 소요유(逍遙遊)이며 ‘도와 합치’라는 편견과 구속까지 벗어나는 경지를 말한다. “이름 없는 것은 항상 그러하여 사라지지 않고, 이름이 있는 건 항상 그러할 수가 없으니 곧 사라지고 만다(道可道非常道).” 했던 월암(月巖) 이광려(李光呂, 1720~1783)의 풀이가 장자(莊子, BC 369~289)가 말한 삶의 본질을 꿰뚫고자 한 말이다.

장자의 ‘소요유편(逍遙遊編)’은 선인들과 많은 점에서 맥이 닿았다. 소요유란 훨훨 날아 자유롭게 노닐다 간다는 뜻이다. 한 마디로 “삶이란 자신의 여하한 틀 속에서 벗어나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생각의 지향점이 스스로 밝혀진다.” 다음 제물론(齊物論)에서는 초월하는 방법론을 비밀히 언급했는데 즉 조삼모사(朝三暮四)에 속지 말것과, 만물제동(萬物齊同) 혹은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한반도에 살았던 선비들이 이런 ‘소요유’와 ‘제물론’에 입각하는 풍류를 즐겼던 문화유산이 바로 아미산(峨眉山), 수미산(須彌山) 혹은 천산(天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인공조산(人功造山)에다가 누정을 지어 놓고, 그 안에서 요산을, 더욱 경치 좋고 물 좋은 곳엔 누정을 마련하고, 대자연을 품 안으로 감싸는 요산요수의 미학(行樂)을 챙긴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젊었을 때는 대자연의 체험을 통해 호연지기를 도야했다면, 늙어서는 누워서라도 소요유를 즐기는 와유(臥遊)를 챙겼다. 바로 와유산수문화(臥遊山水文化)에 빠졌다.

와유산수화와 와유화첩을 통해서도 산수유람을 했다. 그래서 겸재정선(鄭敾)은 100폭의 금강산도를 마련해 와유금강산화첩을 제작했다. 오늘날 용어로 표현하면 “세계 테마기행은 텔레비전을 통해 집안에서 누워서 다 구경한다”가 된다.

사실, 조선 선비들은 학문연찬에는 온 힘을 쏟았으나, 생산적인 활동에 참여만은 지극히도 기피했다. 그런 기질적인 유림의 관행에서 와유문화가 안착했다. 금호강 수변에 누정을 마련해 시회를 개최하는 건. 그 자체가 와유문화의 하나였다. 요산요수의 풍류를 맛보고자 서원, 재실, 서당, 향교 혹은 누정들을 마련했다.

영남유림의 본산이라는 대구 금호강과 낙동강 수변을 중심으로 선비의 선유 혹은 와유문화가 자리 잡았다. 대구의 지인들 가운데 정년퇴임 후 해외여행을 같이 가자고 말하면, “쓸 데도 없이 돈 들여가면서 해외여행을 하다니? 첫째 나라 안도 다 못 갔는데. 둘째 텔레비전 혹은 유튜브 등으로 현지보다 더 자세하고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는데 왜 가야 하나?”고 따지고 든다. 대구 선비답게 와유문화가 지병이 된 모양이다.

◇선인들의 와유문화가 오늘날 ‘지구촌 K-문화’를

와유(臥遊, lying tour)라는 말은 송나라 역사책 ‘송사(宋史)’ 종병전(宗炳傳)에 종병(宗炳, 375~443)은 젊었을 때는 천하명산을 유람했는데 노약해지자, 고향 강릉(江陵)에조차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고향산천 산수를 그림으로 그려서 지난 유람을 회상하는 방법을 창안해 내었다. 이를 후세선비들이 징회관도(澄懷觀道) 혹은 와이유지(臥以遊之)라고 했다. 아예 와유산수(臥遊山水) 혹은 와유강산(臥遊江山)이라고 말까지 생겨났다.

우리나라엔 대표적으로 국보 제217호 ‘금강전도(金剛全圖)’ 100폭 짜리 겸재의 와유산수화가 있다. 금강산의 봉우리는 i) 한눈에 들어오게 부감법을 사용해 구도를 잡았고, ii) 뾰족한 바위봉우리를 수직준법으로 처리했으며, iii) 나무숲이 우거진 흙산은 미법(彌法)으로 표현했다. 그림 오른쪽 여백에다가 “발로 밟아서 두루두루 다녀본다 하더라도, 어찌 베갯머리에서 이 그림을 마음껏 보는 것과 같겠는가?”라고 적어놓았다는 건 와유금강산도(臥遊金剛山圖)라는 의미다.

송나라 화가 종병은 ‘화산수서(畵山水序)’에서 “산수화는 자연풍광을 그리는 게 아니라. 대자연이 가진 장중한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자연미를 반영하는 산수화는 창신(暢神) 곧바로 정신을 펼쳐내는 것이다. 산수화보다 사람의 정신을 유쾌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기술했다.

한편 ‘함순임안지(咸淳臨安志)’의 ‘임포전(林逋傳)’에 의하면 송나라 절강성 항주 화가이며, 시인이었던 임포(林逋, 967~1028)는 와유매화도(臥遊梅花圖), 배 뒤편에 탁자가 놓여 있고, 탁자엔 책이 놓여 있으며, 그 옆 백자(白磁)에 고목 홍매화가 꽂혀 있고 홍매화 위에 학이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통해서 풍류를 즐겼는데 이를 두고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梅妻鶴子)’이라고 했다. 이를 바탕으로 심괄(沈括)은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임포 집에 풀어놓은 학이 구름 위를 날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혹시 손님이 오면 학이 날아들어서 향상 작을 배를 타고 서호(西湖)를 노닐었다...” 고 적고 있다. 중국어 사전 ‘사해(辭海)’에서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스스로 즐겼는데 사람들은 그를 보고 매화로 아내 삼고, 학으로 자식 삼았다”고 했다.

조선 선비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면,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성호전집(星湖全集)’에 ‘와유첩발(臥遊帖跋)’이란 글이 올라와 있다. “와유란 말은 누웠으나 정신이 노니는 것이다. 정신은 마음의 영(靈)이고, 영은 이르지 못할 곳이 없다. 이 때문에 불빛처럼 세상을 비춰 순식간에 만리를 갈 수 있기에 사물에 기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臥遊者 身臥而神遊也. 神者心之靈 靈無不遠. 故光燭九垓, 瞬息萬里, 疑若不待於物).”
 

 
글·그림 = 이대영 코리아미래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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