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 피해현장을 찾아] (中) 가족 상처 받을라 전전긍긍
[전세사기 피해현장을 찾아] (中) 가족 상처 받을라 전전긍긍
  • 조혁진
  • 승인 2023.05.2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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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 건물’ 현수막 걸기로 했지만…
“학교가 근처인 아이, 스트레스 받을까 걱정”
대구 북구 침산동 한 빌라에 갑작스러운 내용증명이 날아들었다. 세입자들이 불법 계약에 따른 불법 점유를 하고 있으니 이번 달 안으로 자진 퇴거를 하라는 내용이다. 세입자들은 전월세 보증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한 채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

이 ‘전세사기 피해’ 건물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예비부부와 신혼부부, 일부는 임신 중이다. 이제 갓 100일이 지난 아기와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고3 수험생과 은퇴를 앞둔 중장년도 같은 건물에 산다.

어린 가족이 있는 피해자들은 앞으로의 미래가 더욱 막막하다. 젖먹이를 데리고 거리에 나앉아야 하는 걱정에서다. 조금 더 큰 자녀가 있는 부부들은 눈앞의 현실을 아이에게 설명하기조차 난감하다.

피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기란 더욱 벅차다. 가족에게까지 고통을 주기 싫은 마음이다. 부모 형제와 친인척에게 피해 사실을 알려야 하는 마지못한 순간 전세사기는 온 가족의 문제가 된다.
 

“우린 높은 아파트 언제 가?”
묻는 어린 아이에 뭐라 할까
고3 자녀에 사실 말할 수 없어
수면제 없인 잠 못드는 사람들

◇아이에게 상처 될까…고민 깊어지는 피해자들

구 모(여·37) 씨 부부에겐 두 아이가 있다. 6살인 첫째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이제 조금씩 글을 읽기 시작했다. 둘째는 겨우 130일 정도를 살아온 젖먹이다. 이들은 지난 2019년 2월 보증금 8천만원을 내고 이 건물에 입주했다. 첫 계약이 끝날 무렵 대구를 덮친 코로나19와 두 번째 계약이 끝날 무렵의 출산이 이 집을 떠나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의도치 않게 집을 비워야 하는 신세다.

가장 큰 걱정은 두 자녀다. 이들 부모가 자녀에게 현실적인 상황을 알리기란 난감한 일이다.

구 씨는 “우리 애가 건물 여기저기에 현수막 등이 붙으면 분명히 물어볼 거다. 그럼 이제 나는 뭐라고 설명을 해줘야 하나 막막해진다”고 말했다. 최근 세입자들이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 현수막을 걸기로 협의한 데 따른 고민이다. 피해 상황을 알리고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해 현수막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이에 따른 고민도 따르는 상황이다.

구 씨의 위층에 사는 박 모(여·34) 씨 부부도 5살이 된 자녀를 양육하고 있다. 이들의 고민도 구 씨와 같다.

박 씨는 “우린 언제 아파트로 이사 가?, 언제 높은 데로 이사 가? 이런 얘기를 아이가 한다. 어린이집 친구들이 좋은 차를 타고 오면 우리도 저런 거 타자고 얘기한다. 대답을 해줄 수가 없다”며 “현수막을 걸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아이가 현수막을 보고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다면 역시 할 말이 없다”고 한숨지었다.

고3 수험생 자녀를 둔 학부모는 자녀 생각에 연신 걱정스러운 마음을 내비쳤다. 우 모(여·48) 씨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상황을 아는 건 괜찮다. 하지만 아이는 너무 예민할 나이라 그게 걱정”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심리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건물 주인이 바뀌었는데, 돈을 안 내고 가서 공동요금이 미납됐다는 식으로만 얘기했었다”며 “시간이 흐르면서 알 수도 있을 거다. 학교가 근처다 보니 우리 집을 아는 친구도 꽤 있다. 학교 생활하는 데도 지장이 있을까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피해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이 건물의 피해자 대다수는 불안감과 수면장애, 집중력 저하 등을 호소했다. 수면제나 술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다는 가구도 많다. 주변의 시선과 무지에 의한 피해라는 댓글 등은 이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고 있다.
 

연세 드신 부모님 충격 받을라
부부 서로 ‘비밀로 하자’ 약속
뉴스 보고 놀라실까 알렸지만

온 가족의 문제로 변해버려
퇴거 이후의 삶 상상도 못해

당장 현실 직시하기도 힘겨워

박 씨는 당초 한국자산관리공사에서 공매 절차를 진행할 당시까지 얘기만을 시댁에 알렸다. 그는 “시댁에서 전세자금을 지원해 주셔서 시댁엔 알렸다. 하지만 시댁은 지금 상황이 긍정적이라고만 알고 있다. 퇴거요청을 받은 건 모르신다”며 “잘될 거라는 얘길 한지가 불과 한 달도 안 됐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언제까지 말을 안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우 씨는 전세 문제가 닥친 후 주변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조그마한 위로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과 또 다른 피해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는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차마 말을 못 하겠다. 남편도 절대 얘기하지 말라고 누누이 당부하더라”며 “얘기했다간 잠 못 주무실 걸 아니까, 나이도 있으시다 보니 더 그런 마음”이라고 했다.

양가에 피해 사실을 알린 구 씨 부부도 마음이 편치 않다. “말을 안 하려 했으나, 뉴스 보고 놀라실까 미리 얘기 드렸다. 부모님들도 이제 관련 뉴스가 나오면 나오는 대로 찾아보고 속상해하신다”며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온 가족의 문제가 돼버린 거다. 주변에서도 알게 될 테니 그것도 마음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가족 걱정까지 더해지며 퇴거 이후의 삶은 상상조차 못 하는 실정이다. 피해자들은 당장 현실을 직시하기에도 힘겹다고 입을 모았다. 일부 가구는 자영업 등에 종사하며 수입마저 불안정한 탓에 더욱 불안한 마음이다.

구 씨 부부는 두 번째 계약이 시작됐을 당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운동 관련 자영업을 하며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탓이다. 그는 “둘째가 태어나고 성수기도 다가오며 더 열심히 해보자고 다짐할 때 전세 문제가 터졌다. 남편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 있냐고 한다. 뭐라도 해보려고 하면 일이 생기니 억울할 수밖에 없다”며 “우리 부부만 살았다면 원룸이라도 들어갈 텐데 아이까지 있어 고민”이라고 토로했다.

조혁진기자 jhj1710@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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